
그새 많이 변했네. 영빈은 오랜만에 찾은 본사 마케팅부문 회의실이 영 어색했다.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던 빔 프로젝터는 천장 부착형으로 바뀌었고, 회의 때면 보드마카 펜으로 무언가를 적곤 하던 화이트보드 대신 한쪽 벽면이 판서 가능한 반투명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지난 회의의 흔적인 듯 고객 분석 데이터와 타깃 인사이트 등이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영빈은 빈 회의실에서 홀로 앉아 벽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옛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윤수 팀장이 헐레벌떡 회의실로 들어온 것은 이십여 분 정도 지난 후였다. “영빈아, 내가 불러놓고 늦어서 미안하다. 앞 회의가 생각보다 늦어졌네” “아니에요. 무슨 회의였는데요?” “뭐겠냐. 이맘때면 늘 하는 내년 사업전략 회의지. 전략 애들은 어차피 마지막에 지들 맘대로 할..
“야. 이름값 좀 해라. 이름은 무슨 무협지 주인공 같은 놈이 그렇게 소심해서야. 쯧” “송구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컴택 마케팅팀 강혁 팀장이 오쌍진 상무 앞에서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쌍진은 방금 회의에서의 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왜 재무부문 애들이 딴지 걸어올 때 한 마디도 못해? 걔들이 어이구 그러세요, 돈 쓰고 싶은 만큼 쓰셔야죠, 하는 애들이냐? 싸워서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도 스마트폰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데 전년 대비 광고판촉비 130% 증액은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요…” “야 이 등신아! 네가 짠 예산 아니야?” 쌍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고 강혁은 그보다 머리 두 개 정도 큰 키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맞잡은 두 손을 꽉 쥐며 고개..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에 기획 2팀은 주간업무 회의를 한다. 호진은 오늘 회의에서 내년 사업 계획을 확정 짓고자 했다. 여느 회사가 그렇지만 광고 대행사의 사업 계획이란 결국 실적 목표가 다였다. 어느 광고주에게서 얼마의 광고 예산을 따올 것이고, 목표에 부족한 액수를 채우려면 신규 광고주를 어떻게 유치할지 팀원들과 의견을 조율해서 정리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회사가 내려준 비현실적인 목표를 놓고 걱정하고 짜증 내다가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하고 대책 없는 희망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팀의 가장 큰 광고주인 컴택은 한 달 전 애뉴얼 PT가 잘 끝난 덕에 내년 목표도 차질 없을 것으로 한숨 돌렸지만 문제는 연간 30억 광고주인 빅마트였다. 수도권 대도시에서 30여 개의 대형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