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케치북은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다. 고등어며 갈치 토막 같은 생선 그림이 이어지다가 그리다 만 것 같은, 몇 부분만 난폭하게 칠해진 페이지가 계속됐다. 무심코 넘기던 손이 멈춘 것은 사람의 얼굴이 나왔을 때였다. 지금까지와는 그림이 달랐다. 잘 그렸다고 할 순 없지만, 어린아이의 실력이 아니었다. 성인의 손길로 정성껏 그린 얼굴. 어느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는 어머니의 필체로 ‘오영수’라고 쓰여 있었다. 그날 순영은 아침부터 머리가 맑았다. 아주 가끔씩 증상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과거의 기억은 다시 선명해지는 대신 병을 앓고 난 후의 일은 기름종이를 댄 밑그림처럼 희미하고 어렴풋했다. 순영이 이곳에 온 후 겪은 일도 그랬다. 몇 개의..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다.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에 갈 때마다 편의점을 닫을 수 없었다. 낮 시간대 알바 공고를 올리고 처음 연락 온 사람을 바로 채용했다. 휴학 중인 대학생이었는데, 미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는 싹싹하고 눈치가 빨랐다. 처음에는 자리를 비우고 카운터를 맡기는 것이 불안했지만 몇 번 지나지 않아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점장님 복받으셨네요. 매장을 담당하는 본사 직원은 미성이 일하는 모습을 보더니 밖에서 함께 담배 피우던 중에 말했다. 요즘 여자 알바 중에 저만큼 하는 애들, 정말 드물고 귀하다고요. 어머니를 모신 요양원은 차로 한 시간가량 걸리는 곳에 있었다. 수도권 인근에 있는 요양원 중 가장 시설이 좋은 곳이었고, 그만큼 비용도 상당했다. 하지만 가족과 같이 살던 집을 팔고 난 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