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은 올라가는 쪽 에스컬레이터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메뉴를 생각하고 있었다. 빨간 소스가 올려진 덮밥 종류는 후보에서 뺐다. 어제 저녁으로 김치 볶음 덮밥을 먹고 나서 종일 뱃속에 알싸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이제 소화 기능도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자 퇴근길 다리가 한결 무거웠다.저녁이면 늘 붐비는 노량진역이지만 오늘은 한 시간 늦게 퇴근해서인지 반대편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에 사람이 더 많았다. 대부분 어린 청년들이었다. 공무원 준비 학원이나 독서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었다.역 밖으로 나오니 삼삼오오 모인 이십 대 남녀들로 시끌벅적했다. 공부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는 것인지 근처의 술집은 만원이었다. 15분 정도 걸어가야 나오는 ..
이훈 대통령이 입술을 깨문 채 답할 말을 찾고 있을 때 UN 사무국장 알렉세이가 말을 이었다. “한반도의 낮은 출산율은 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회의실 중앙의 홀로그램 화면이 바뀌자 엄지를 위로 세운 주먹 모양의 아이콘이 떠올랐다. “세계적인 독서 열풍과 달리, 한국만 유독 책을 읽지 않습니다. 대신 국민적 인기의 가상 현실 서비스가 있는데요. 지금 보시는 이것입니다.” 주먹 모양의 아이콘 아랫부분에 영어로 ‘JOA’라고 쓰인 로고가 보였다. “관계 맺기에 특화된 프로그램입니다. 한국어로 ‘좋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가상 현실에서 다른 사람의 일상이 담긴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마음에 들면 엄지를 세운 아이콘을 눌러 호감을 표시합니다. 엄지를 많이 받는 사람은 유명인이 되기도 합니다.” “알고 있..
“지구 상의 자원이 곧 고갈되고 인류는 공멸하고 말 겁니다. 세계 인구가 140억 명을 넘어서는 건 시간 문제입니다.” “140억? 작년 예상보다 10억이 늘었다니. 양자 컴퓨터 계산에 착오가 있었던 건가?” “당시 추정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변한 것뿐이지요.” “2217년 당시 세계 인구의 합계 출산율이 3명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4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뭄바이에 위치한 UN 센터에 5명의 통합 블록 대통령이 모였다. 개별 국가 체계를 대신해 5개의 블록으로 국적이 통합된 게 2100년도였다. 브라질을 중심으로 두 개의 아메리카 대륙을 통합한 블록 1과 통일 한국이 수장이 되어 중국, 일본, 호주를 흡수한 블록 2가 경제력은 가장 앞섰으나, 사실상 의사결정권을 지닌 최강국은 인도가 이끄는 서..
시간이 남았으나 나갈 차비를 마친 후 영호는 집을 나섰다. 기타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이 민망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속 장소인 공원에 도착해 중앙 광장 구석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일 오후라 주변은 한산했다. 영호는 핸드폰을 열어 로망스와의 대화를 다시 한번 훑어보며 어떤 사람일까 상상해 봤다. 말투로 봐서도,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깎아달라는 말없이 바로 사겠다는 걸로 생각할 때 나이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백발에 인상 좋은 노신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은퇴한 교수님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별 어려움 없이, 더 이상 이룰 것 없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온 사람.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부러움과 함께 작은 질투가 발바닥에서부터 꼬물대는 것이 느껴졌다. 로망스의 프로필 사진은 컵..
“한국의 교육 환경에 애가 적응을 못할 거 같아.” 최근 계속되는 야근으로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영호를 아내가 부엌으로 불렀다. 그러고는 더 늦기 전에 뉴질랜드로 보내야겠다면서 유학원 팸플릿을 식탁 위에 늘어놓으며 영호에게 말했다. 상의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게다가 여자애 혼자 보낸다는 건.” “그러니까 나도 같이 가야지.” 피곤에 절어 흐리멍덩하던 영호의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이 왔다. 말로만 듣던 기러기 아빠가 되는 건가. “돈은 어떻게 마련하려고. 이 집은 어떻게 하고.” “일단 전세로 돌려서 급한 대로 써야지. 당신한테는 미안하지만 작은 원룸 얻어서 거기서 지내 줘. 어쩌겠어. 애 잘 키우는 게 우선이잖아. 같이 딱 4년 정도 고생한다고 생각하자.” 좋은..
구릿한 냄새에 영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머리에서 풍기는 악취가 잠결에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틀 동안 안 씻고 있었으니 비단 머리뿐 아니라 온몸에 찐득한 때가 끼어있는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조그만 원룸이 환했다. 창문에 반투명 커튼을 쳐 놓았지만 강한 햇빛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싱글 사이즈 침대 다섯 개 정도 크기의 공간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과 빈 컵라면 용기, 맥주 캔과 소주 병 때문에 더 비좁아 보였다. 쨍한 햇살 사이로 부유하고 있는 먼지가 또렷했다.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창문을 열고 전자 담배 전원을 켰다. 점심시간인 듯 근처 중학교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임을 알려주는 것처럼 상쾌했다. 일어나자마자 피는 담..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슬픔 대신 분노를 택한 영호는 그에 걸맞은 직업을 가졌다. 경찰이었다. 마침 1년 전세 기간이 끝난 부산의 집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 노량진 고시촌으로 들어간 그는 첫 응시에서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고 오직 공부와 체력 단련에만 집중했다. 사람과 어울릴 이유와 여유 따윈 없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분노라는 감정을 마주했을 뿐이다. 모든 게 부조리했고 세상은 불합리했다. 대상을 찾을 수 없이 불타오르고 있는 화를 법에 저촉되지 않게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범죄를 단죄하는 것이었다. 영호는 높은 점수로 합격했는데 상위권 지원자들은 몸이 편한 내사 부서를 지원했지만 그는 강력계를 택했다. 체력 시험 준비 수준을 넘어 몸..
[아무런 느낌 가질 수 없어요] 영호는 작은 나무 상자를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채 택시 뒷좌석에 앉아 눈 덮인 산등성이를 바라봤다. 하얀 보자기로 감싼 정사각형 상자 안에는 한 번 안아 보지도 못하고 눈을 마주해 보지도 못한 아기가 들어 있었다. 능선을 따라 이어진 구부러진 길을 지나야 해서 택시는 속도를 줄였고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진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화장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 작은 것이 얼마나 뜨거울까. 따스한 엄마 아빠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하고 뼈마저 녹이고 삭혀 버릴 불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기쁨이가 너무 가여워서 영호는 숨죽여 흐느꼈다. 상자에 담긴 채 아기가 화장로 속으로 들어간 후에 영호는 유골함을 판매하는 매장으로 갔다.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좋은 걸로 골라야..
[사랑은 이제 내게 남아있지 않아요] 핸드폰 진동이 울리며 루카스 이름이 화면에 떴다. 수진에게 연락할 때면 그는 언제나 메시지 대신 전화나 영상 통화를 했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너무 옛날 방식 아니냐고 농담처럼 놀릴 때면 “당신 목소리를 듣고 싶고, 당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게 좋기 때문이야”라고 수줍은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일할 때는 몇 개의 메신저를 번갈아 사용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수진이었다. 지금도 점심 식사는 어땠는지,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는지,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등 별것 아닌 내용이었지만 통화하는 내내 그의 들뜬 기분이 전해왔다. 지금까지 항상 변함없는 사람. 늘 이렇게 날 사랑해 줄 것 같은 사람. 그를 생각할 때면 수진은 환한 햇살이 눈이 부셔 잠에..
[이렇게 다시 후회할 줄 알았다면 아픈 시련 속에 방황하지 않았을텐데] 왜 사제가 되고 싶었을까. 영호의 어머니는 독실한 신자였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사제 시키고 싶어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가족이라곤 둘 밖에 없어서 였는지도 몰랐다. 성적이 좋은 편이었던 영호는 의대나 법대를 졸업하고 빨리 성공해서 엄마를 돕고 싶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사교육은 필요했고 학원비를 대기 위해 어머니는 밤낮없이 일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성당에서 복사를 섰던 건 그가 제대 위에 올라있는 모습에 기뻐하는 어머니를 위해서였지, 4년간 함께 복사를 섰던 친구처럼 신학교 입학을 꿈꾼 적은 없었다. 고 3 여름방학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운 심정지였다. 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