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치북은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다. 고등어며 갈치 토막 같은 생선 그림이 이어지다가 그리다 만 것 같은, 몇 부분만 난폭하게 칠해진 페이지가 계속됐다. 무심코 넘기던 손이 멈춘 것은 사람의 얼굴이 나왔을 때였다. 지금까지와는 그림이 달랐다. 잘 그렸다고 할 순 없지만, 어린아이의 실력이 아니었다. 성인의 손길로 정성껏 그린 얼굴. 어느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는 어머니의 필체로 ‘오영수’라고 쓰여 있었다. 그날 순영은 아침부터 머리가 맑았다. 아주 가끔씩 증상이 사라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과거의 기억은 다시 선명해지는 대신 병을 앓고 난 후의 일은 기름종이를 댄 밑그림처럼 희미하고 어렴풋했다. 순영이 이곳에 온 후 겪은 일도 그랬다. 몇 개의..
둘의 첫 식사는 칼국수였다. 겨울이었다. 오는 길에 따왔다며 내밀 과일이 없을 계절이었다. 영수가 순영의 책상을 찾지 못한 채 몇 주가 흐른 후, 종일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며 눈은 그쳤다. 순영 자리로 걸어오던 영수는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놓고 지나갔다. 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으로 네 번 접힌 종이였다. - 과일 값 주세요 또박또박한 글씨로 쓰인 문구를 보고 풉. 순영은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소리를 숨기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일곱 시에 백조 다방에 있겠습니다. 부담되시면 안 오셔도 됩니다. 순영은 대각선 뒤쪽의 영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비어 있었다. 누가 볼까 싶어 종이를 얼른 서랍에 넣은 순영은 남은 비용 처리를 계속했다. 계산이 자꾸 틀렸다. “안 오실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