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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첫 식사는 칼국수였다. 겨울이었다. 오는 길에 따왔다며 내밀 과일이 없을 계절이었다. 영수가 순영의 책상을 찾지 못한 채 몇 주가 흐른 후, 종일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며 눈은 그쳤다. 순영 자리로 걸어오던 영수는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놓고 지나갔다. 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으로 네 번 접힌 종이였다.
- 과일 값 주세요
또박또박한 글씨로 쓰인 문구를 보고 풉. 순영은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소리를 숨기려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일곱 시에 백조 다방에 있겠습니다. 부담되시면 안 오셔도 됩니다. 
순영은 대각선 뒤쪽의 영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비어 있었다. 누가 볼까 싶어 종이를 얼른 서랍에 넣은 순영은 남은 비용 처리를 계속했다. 계산이 자꾸 틀렸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어서요. 과일 값 드리려고요”
“저 이렇게 여자분에게 해보는 거 처음입니다. 실례되는 행동인 줄 알았지만…”
테이블 가운데를 바라보는 영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감싼 커피잔이 따듯하다고 순영은 생각했다. 창밖의 가로등과 맞은편 건물의 불빛을 한참 바라보던 순영이 입을 열었다.
“커피는 과일 값으로 제게 살게요. 밥은 그쪽이 사세요”
고개를 들어 순영과 눈을 맞춘 영수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이렇게 말이 많은 남자인 줄 순영은 처음 알았다. 회사 이야기,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이야기, 군대 이야기까지. 배고프다는 순영의 말에 식은지 오래인 커피를 영수는 한숨에 들이켰다.

순영이 그릇을 비울 때까지 영수는 반도 못 먹었다. 젓가락에 걸린 국수 가락을 몇 번이고 후후 불고 나서야 입에 넣는 모습에 순영은 몇 번이나 웃었다.
“아니 뜨거운 걸 그렇게 못 드시면서 왜 칼국수 집으로 왔어요”
영수는 의자에 걸쳐놓은 순영의 코트를 보면서 말했다.
“순영 씨 추워 보여서요. 바람이 찬 데 코트가 너무 얇은 것 같아서. 뜨거운 거 먹이고 싶었어요”
말없이 걷다 보니 회사 근처였다. 퇴근 시간 한참 후라 누군가의 눈에 띨 걱정은 없었다. 오늘 감사했어요.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질 때 순영이 영수를 보며 살짝 고개 숙였다. 아. 잠깐만요. 영수가 옆에 있는 가게를 들어가며 순영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아주머니. 귤 이천 원어치만 주세요”
“오랜만이네 총각. 오늘은 어쩐 일로 한 알만 안 사고?”
“네. 오늘부터는 많이 살게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는 순영에게 귤 봉지를 내밀었다. 들켰네요. 잘 먹었어요. 순영이 가게 아주머니에게 대신 인사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순영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한 알씩 귤을 까먹었다. 백열등에 비친 방 풍경은 평소보다 한결 따듯했다.

바나나 다음 그림은 귤이었다. 과일이라는 걸 알았으니 여러 개의 주황색 동그라미가 무엇일지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음은 수박이려나, 생각하며 넘긴 페이지의 그림은 익숙한 동그라미가 아니었다. 비스듬한 네모 위에 여러 도형이 있었다. 잠깐 당황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밥상이었다. 밥상 위에 하얀 동그라미는 밥, 빨갛고 긴 네모는 김치다. 가운데 가장 큰 원은 색으로 추측건데 된장찌개로 보였다. 

이상했다. 어머니가 만든 된장찌개를 먹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청국장을 먹고 체했는지, 심하게 배앓이를 한 후로 냄새도 맡기 싫다고 했다. 아버지는 정반대였다. 국물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던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청국장이었다. 어머니는 된장을 빼고는 소고기 국이며 김칫국, 감잣국 등을 매번 새로 끓여 밥상 위에 올렸다. 때문에 불만을 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아버지도 몇 번인가, 어머니에게 들릴 것이 뻔한 혼잣말을 홧김에 하곤 했다. 에이 썅. 이놈의 집구석에선 청국장 한 그릇도 못 얻어먹네. 만드는 걸 배운 적이 없어 그런가. 아버지가 밖에서 소주라도 한잔하고 들어올 때면 고기와 진한 된장 냄새, 술 냄새가 섞인 역한 풍취가 났다.

“아이고. 순영 할머님이 예쁜 밥상을 그리셨네요. 요리도 잘 하실 것 같아요”
요양사가 순영이 그린 그림을 칭찬할 때 맞은편에서 크게 어어. 하는 소리가 났다. 오영수라는 이름의 노인이었다. 순영이 그림을 설명할 때마다 바라보던 노인.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헤에, 천장만 보며 웃을 뿐이던 그가, 이번에는 일어날 듯 엉덩이를 들썩이며 손가락으로 순영의 그림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어. 어어. 소리와 함께 순영이 그린 밥상을 향해 흔들리던 손가락은 영수의 스케치북에 그려진 생선 같아 보이는 그림을 찌르기 시작했다. 순영도 영수의 그림을 보고 반가운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고등어. 고등어.

“순영 할머님과 영수 할아버님. 참 잘 하셨어요. 다른 어르신들도 이렇게 그림으로 맘껏 마음을 표현해 주세요”
요양사는 프로그램을 마치며 두 노인을 칭찬하고 진심 어린 손뼉을 쳤다. 치매 환자들이 그림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아주 좋은 자리였다고, 오늘 일을 언젠가 성공 사례로 쓸 수 있도록 기록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순영의 책상에 과일이 놓이기 시작한 계절이 다시 돌아왔다. 둘이 함께 산지 3개월이 지났다. 서로 날짜를 맞춰 잡은 여름휴가 때 영수는 순영의 집에서 머물렀다. 뭐 하러 바가지요금 쓰면서 사람 많은 데로 가요. 난 순영 씨와 함께 있는 게 최고의 휴간데. 순영이 부어준 물로 등목을 마친 영수가 수박을 양껏 베어 물고 우물대며 말했다. 그의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수박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아주며 순영은 가만히 웃었다. 

“같이 삽시다. 당신하고 단 일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휴가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려 신발을 신던 영수는 순영을 와락 끌어안고 말했다. 
“당장 결혼하기는 힘들겠죠.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집에는 잘 설명드릴게요. 몇 달만 기다려주면돼요. 나 믿죠?”
순영의 코에 닿은 영수의 가슴팍에서 수박 냄새가 났다. 순영은 말없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꼭 묻고 있었다.

9월이 되며 영수는 회사를 그만뒀다. 순영과의 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회사 사람들은 둘 사이를 알지 못했다. 출퇴근도 시간 차이를 두고 했고, 회사에서도 예전처럼 전표를 주고받는 것 외에는 접촉을 피했다. 그의 퇴사에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느 틈에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그가 오랜 거래처인 시행사의 아들이고, 회사를 물려받기 전에 현장 경험 삼아 입사했다는 사실을 순영은 함께 살기 시작한 첫날 영수의 입을 통해 들었다. 집에는 뭐라고 하고 나왔는지 순영은 묻지 않았다. 

“부모님은 걱정하지 말아요. 찬찬히 말씀드리면 금방 괜찮아 지실 거예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요”
몇 벌의 옷가지만 챙겨온 가방을 내려놓으며 영수는 밝게 웃었다. 엄마, 아빠와 동생을 보내야 했던 그때, 자신을 바라보던 친척들의 눈빛이 순영은 떠올랐다. 가여움과 안쓰러움 뒤에 숨어있는 난처함. 그리고 떨떠름한 기운이 베여있던 어색한 미소. 순영은 그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는 고기보다 생선을 좋아했다. 퇴근길에 영수는 자반고등어 한 손을 들고 오곤 했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부서장을 맡은 영수보다 부서 경리인 순영의 퇴근이 빨랐다. 그녀는 고등어를 굽는 동안 뜨거운 것을 못 먹는 영수를 위해 미리 끓여 놓은 청국장을 식혔다. 미지근하게 식은 국그릇에 밥을 쓱쓱 비비며 영수는 말했다. 난 평생 당신이 해주는 청국장 먹고 싶어. 이거 하고 당신만 있으면 돼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당신만 있으면. 버릇 같은 영수의 이 말이 부쩍 늘기 시작한 것은 부모님과 살던 집에 다녀오는 주기가 짧아지면서부터였다. 오늘 하루는 자고 올게요. 영수가 없는 밤에 순영은 누군가 초인종을 누를 것만 같아 가슴이 뛰었다. 드라마에 나왔던 것처럼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찾아오는 것 아닐까. 흰 봉투를 가만히 건넬지,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내 아들 신세 망치려고 작정했어. 한바탕 난리를 피울지. 그 남자의 부모님은 어떤 사람일지. 지금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남자가 돌아오기는 할지. 라디오를 켜놓고 밤새 뒤척이다 보면 날이 밝았다.

단성사 극장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였다. 눈물 없이 못 보는 세기의 사랑. 신문 광고의 문구처럼 영화는 슬펐다. 영수는 내내 콧물을 훌쩍이며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갔다. 버스 제일 뒷좌석 창가에 나란히 앉아, 만약 주인공의 사랑이 행복하게 마무리됐다면 어땠을까. 그는 아쉬운 듯 스토리를 지어내고 있었다.
“만약에 말인데요. 우리가 헤어진다면, 굉장히 슬프겠지요”
영화 이야기에 이어 영수가 무심결에 말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순영의 얼굴에 떠오른 잔잔한 미소가 어두운 유리창에 비쳤다.
“우리가 멀어지게 된다면, 그때는 멀어지는 게 슬프지 않을 거예요. 그러는 게 자연스러울 때라는 거겠지요” 순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집에 들어온 영수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오늘은 담판을 짓겠다며 집에 다녀온다던 날이었다. 으레 하룻밤 자고 오겠지. 잠을 설치던 순영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현관으로 나갔다. 어디서 넘어졌는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웅크린 채 주저앉은 영수의 손가락에 피가 맺혀 있었다. 이미 정신을 잃은 채였다. 겨우 방으로 데려와 누인 그의 손가락에 연고를 발라줄 때였다.
“미안해요”
울먹이는 목소리의 잠꼬대를 들은 순영은 자신의 손에 약이 묻어있는 걸 잊은 채 영수의 뺨을 어루만졌다. 뺨을 만지다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굳게 잠긴 그의 눈꺼풀을 두어 번 매만질 때 순영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세요. 당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순영은 조용히 영수의 짐을 쌌다. 해장국을 끓여놓고 새벽에 집을 나왔다. 회사에 도착할 때쯤 어스름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해가 떠오르는 창밖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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