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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빨리 떠나게 되어서 아쉽네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한유리 과장이 카페 토라세 방배점 직원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자 모두가 손뼉을 쳤다. 본사에서 잠시 스쳐지나 가는 낙하산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예쁜 얼굴로 뺀질거릴 거라 여겼던 그녀가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진심으로 방배점 식구들과 어울리려 했다는 걸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과장님, 보고 싶을 거예요, 자주 놀러 오세요”

“하긴 점장님 보러 오시겠구나, 하하”

남자 직원들이 큰소리로 한유리의 인사에 화답했다. 넉살 좋은 농담에 매장 사무실에 모인 모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리 과장님하고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강한나가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한유리를 바라봤다. 처음에는 한나 역시 유리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벚꽃 매장에서 함께 고생한 이후로는 진심으로 동료로 여기고 있었다. 최근에는 가끔씩 서로의 속내를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기에 누구보다 아쉬움이 컸다.

“어디 못 만날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닌걸요. 그런데 다리는 좀 어때요?

 

일주일 전 자라섬 팝업 매장 공사 현장에서 다친 한나의 발목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플라스틱 지지대로 고정한 채 걷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나았어요라고 답할 때 매장 사무실에서 나가려던 서한준이 한나를 불렀다.

“매니저님, 조금 이따 자라섬 현장 점검하러 같이 가요”

“응, 그래” 한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오는 길에 밥 먹고 와요. 괜찮은 데 찾아 놨거든요”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유리가 실눈을 뜨고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매니저님,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뭔가 있어 보이는데”

 

방배점에서 멀지 않은 어린이 놀이터는 아이들이 모두 학교나 유치원에 있을 시간이라 한적했다. 놀이터를 아늑하게 둘러싸고 있는 가로수가 깊어가는 가을의 색을 입고 노랗고 빨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어머, 정말이요?” 유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한나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유리가 수줍은 기색이 가득한 한나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그녀의 양손을 꼭 잡았다.

“축하해요. 난 왠지 둘이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 같았어요. 떠나기 전에 좋은 소식 들어서 너무 다행이다”

참새 몇 마리가 날아와 서성이는 조용한 놀이터 한구석, 가을 햇빛이 잘 비치는 벤치에 둘이 나란히 앉아 한참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만호야, 어제도 잘 먹었어. 네가 만든 제육볶음 말이야, 밀키트 같은 걸로 출시하면 대박 날 것 같은데? 본사에 상품화해보자고 이야기해봐”

조리실에서 막 만들어진 케이크를 가져와 카운터 냉장 쇼케이스에 넣고 있는 만호를 보며 남자 직원이 말했다. 아직 술이 깨지 않은 듯 눈언저리가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지난 회식 이후 직원들끼리 모이는 술자리를 만호의 가게에서 갖는 경우가 늘었다. 어제도 만호를 포함해 네 명이 퇴근 후 번개 술자리를 가졌다. 함께 어울리는 무리 사이에서는 나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고, 막내인 만호에게 모두가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예지 씨 볼 때마다 너무 괜찮던데. 진짜 한 번 잘 해봐”

“걔는 그냥 동네 친구예요. 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그런 사이 아니에요”

다시 조리실로 돌아가는 만호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회식을 마친 후 모두가 돌아간 빈 식당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예지의 어깨를 안은 채 한참을 서 있던 그 밤 이후, 만호는 예지를 생각할 때면 가슴에 큰 구멍 하나가 뚫려있는 듯했다. 그건 민주를 향한 마음과는 또 다른 형태의 아픔이었다.

하지만 예지는 그날 일을 잊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털털하게 만호를 대했다. 어제 동료들과의 술자리에도 틈틈이 찾아와 안줏거리를 챙겨주곤 했다. “예지 씨가 그냥 제수 씨하면 좋겠다라는 짓궂은 농담에도 어색하지 않게 농담으로 대꾸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말이 아니어도 전해지는 확실한 무엇이 담겨 있었다. 만호의 품에 오랫동안 안겨있던 그녀가 몸을 떼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미소 지으며 했던 말이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여기 이렇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 네게 선택할 기회를 줄게. 그리고 만약 내가 아니라면, 난 더 이상 네 곁에 있지 않을 거야. 만호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 줘

 

재즈 페스티벌 마지막 날에는 가을다운 서늘하고도 조용한 비가 계속 내렸다. 공연 프로그램에서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미국 출신 퀸텟의 연주도 마침 어제 끝났고, 오늘은 소품 규모의 공연으로만 구성되어 관객이 드문드문했다.

마지막 영업일이라 팝업 매장 직원들도 긴장을 풀고 멍하니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조만간 우리 만나서 꼭 뒤풀이해요

영업 종료 시간이 되어 집기를 정리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민주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배점만으로는 인원이 부족해서 인근 강촌점의 직원 3명이 팝업 매장에 합류했다. 며칠간 함께 고생하면서 어느새 서로 가까워지려 할 때 마지막 날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방배점 놀러 갈게요. 근처 맛집에서 한잔하자고요

군인 같은 짧은 머리에 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강변점의 남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한준과 악수하며 말했다.

 

출발할까요? 점장님 막 주차장에 도착하셨대요강한나 매니저가 통화를 마치고 말했다. 첫날에 유영빈 점장이 운전해서 방배점 직원들을 인근 숙소로 데려다줬고, 마지막 날인 오늘도 서울까지 데리고 가려 오기로 했다.

유리 과장님도 같이 왔다고 하네요. 고생했다고 저녁 사고 싶다고요

우리 핑계로 두 사람 드라이브 나온 건 아니고요?”

한준의 농담에 한나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다 자기 같은 남자라고 생각하진 마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민주가 이 커플 사이가 좋은 건지, 아닌 건지. , 헷갈린다라고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멀리 스테이지에서 들려오는 은은한 트럼펫 소리에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의 리듬이 절묘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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