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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많이 변했네. 영빈은 오랜만에 찾은 본사 마케팅부문 회의실이 영 어색했다. 테이블 중앙에 놓여있던 빔 프로젝터는 천장 부착형으로 바뀌었고, 회의 때면 보드마카 펜으로 무언가를 적곤 하던 화이트보드 대신 한쪽 벽면이 판서 가능한 반투명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지난 회의의 흔적인 듯 고객 분석 데이터와 타깃 인사이트 등이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영빈은 빈 회의실에서 홀로 앉아 벽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옛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윤수 팀장이 헐레벌떡 회의실로 들어온 것은 이십여 분 정도 지난 후였다.

“영빈아, 내가 불러놓고 늦어서 미안하다. 앞 회의가 생각보다 늦어졌네

“아니에요. 무슨 회의였는데요?”

“뭐겠냐. 이맘때면 늘 하는 내년 사업전략 회의지. 전략 애들은 어차피 마지막에 지들 맘대로 할 거면서 왜 이렇게 내놓으라는 게 많은지.

윤수의 한숨 섞인 말투에 영빈이 피식 웃었다. 이곳에서 박윤수 팀장과 함께 밤을 새가며 빔 화면에 띄워진 사업 계획을 수정하던 때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윤수가 미소 짓고 있는 영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돌아올 준비해. 너 복귀 확정됐어

 

“얼씨구, 별로 반기는 얼굴이 아닌데?”

웃음기가 사라진 영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윤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새삼스러울 게 없어서 그래요. 돌아오는 거야, 여름부터 팀장님이 계속 얘기하셨으니까

달갑지 않은 표정을 숨기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영빈 쪽으로 박윤수 팀장이 몸을 기대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까딱하다가 너 영업 본부에 뺏길 뻔했어. 하마터면 너, 점장으로 말뚝 박을 뻔했다고

 

방배점에서 시작해서 전 매장으로 확대된 한정판 케이크부터 연이은 팝업 매장의 성공까지, 점장으로써 영빈의 입지가 탄탄해질수록 영업본부에서 인사 쪽에 작업이 들어갔다고 윤수는 말했다.

마케팅 출신이라고 해서 꼭 본사로 복귀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오히려 마케팅 시각으로 현장을 운영하니 이렇게 좋은 성과가 나지 않는가, 그러니 유영빈을 향후 영업 전문가로 키우고 싶다는 욕심을 영업본부장이 임원 회의에서 스스럼없이 내비쳤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훅 들어오니까 오히려 우리가 더 마음이 급해진 거야. 너 당연히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그림 짜 놓고 있었는데 발등에 불 떨어진 거지

윤수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그런데, 어제 우리하고 영업하고 결론냈어. 너 이번 정기 인사 때 발령 날 거야. 마케팅 팀장으로

 

팀장이라는 말에 영빈이 깜짝 놀랐다.

“팀장이요? 그럼 팀장님은요? 설마, 임원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야, 난 아직 짬이 안되지. 난 그냥 여기 있고, 넌 새로 만들어지는 팀을 맡을 거야

LJ 그룹은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건강 콘셉트의 즉석 샌드위치 브랜드를 새로 론칭할 계획을 세웠고, 영빈이 브랜드 개발과 마케팅의 적임자로 선택됐다고 박윤수 팀장이 말했다.

“이 명분을 내세워서 영업 본부 욕심을 꺾어버린 거지. 카페 매장 운영 잘하는 것과 그룹의 미래 신사업을 책임지는 것 중에 뭐가 더 중요하냐? 답은 뻔한 거 아니겠어

 

여러 종류의 베이커리를 시도한 성과 덕분에 방배점이 매출 신장한 사실이 그가 발탁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박윤수 팀장이 덧붙였다. 이제 한 달 정도 남았으니 현장에서 마무리 잘 하라는 말과 함께 윤수는 영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줬다. 확신과 기대에 찬 그의 표정에혹시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냐라는 말을 영빈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에이, 오늘도 같이 퇴근하려고 했는데

서한준이 한껏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점장님이 할 말이 있다며 저녁 먹자고 했다는 강한나 매니저의 말을 듣고 난 후였다. 예전 같았으면 아이처럼 칭얼대는 이런 모습이 영 보기 싫었을 텐데, 요즘의 한나에게는 한준이 무엇을 하든 귀여워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래요? 왜 단둘이 보자고 한 거예요?”

모르겠어. 아까 본사 다녀온 후 바로 시간 되냐고, 이야기 좀 하자고. 그런데 표정이 좋지는 않던데

한유리 과장님 두고 매니저님한테 뭐 다른 마음 있는 건 아니겠죠?”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서한준의 표정에 강한나가 아이에게 꿀밤을 때리려는 어른 같은 자세를 잡았다.

하여간, 생각하는 것 하고는

 

영빈이 어렵게 꺼낸 말에 한나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대꾸했다.

그렇게 고민할 만한 일인가요?”

한나의 반응을 예상한 듯 영빈은 쓴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한나가 말을 이었다.

점장님도 알고 있었잖아요. 본사에서 현장 와서 이 년이면 다시 복귀한다는 것. 그거 모르고 나온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기 남으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건데요? 지금까지 십 년 넘게 해 온 마케팅 대신 점장에 승부를 걸 거예요?”

알죠.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래도 여기가 잘 정리가 안돼서. 답답하니까 매니저님 의견 듣고 싶었던 거예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키는 영빈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는 다 똑같구나.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소심해지고 어린애같이 굴고. 서한준이나 유영빈이나 똑같네라는 생각에 한나는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냥 가세요. 본사 돌아가서 여기서 배운걸, 현장에서 깨우친 걸 퍼뜨리고 적용시키면 되잖아요

영빈과 한나 둘이 소주 한 병도 채 비우지 않고 자리는 마무리됐다. 대화도 거의 없었다. 영빈이 한숨 한 번 쉬면 한나가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는 모습의 반복일 뿐이었다.

그만 일어나자고 먼저 말한 것도 한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한나는 딴 생각 말고 본사로 돌아가라며 다시 한번 못 박 듯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에 점장님이 떠난 후 방배점이 걱정이라면

검은 뿔테안경 속 한나의 눈초리에 힘이 담겨 있었다.

후임 점장은 제가 할 테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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