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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말씨름은 계속됐다. 한나는 핏대를 올리며 싸우느라 한준이 있는 쪽으로 한껏 몸이 기울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나가 손을 휘저으며 한준의 말을 반박할 때면 가끔 둘의 어깨가 스치기도 했다. 움찔하며 놀란 건 오히려 한준 쪽이었다. 뒤에서 보이는 둘의 모습은, 한창 사랑싸움 중인 연인 사이였다.

 

“매니저님. 잠시만 가라앉히시고, 뭐라도 좀 드세요. 안주 없이 술만 마시면 속 버려요”

성난 기분에 술만 들이키다 보니 한나의 커다란 하이볼 잔에는 얼음만 남아 있었다. 한준의 말에 허기를 느낀 한나는 앞접시에 놓인 오코노미야키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몇 번 우물대던 중에 커다랗게 커진 한나의 눈을 보고 한준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죠? 여기 예약하기 되게 어려워요. 한 달 전에 겨우 한 거라고요”

 

한 달 전이면 자기가 이길 거라고 이미 확신했구나. 한나는 그가 짜놓은 계획대로 였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에 젓가락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음식 덕분인지 한나는 방금보다는 한결 차분해 보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맛있게 먹고 가자’라고 생각할 때였다. 한준이 메로구이와 참치 대뱃살 초밥을 추가로 주문했다. 한나의 잔이 빈 것을 보고 “하이볼 한 잔 더 하실래요?”라고 그가 물었을 때 한나는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라고 대답 대신 자기 술을 주문했다.

 

“마음껏 드세요. 오늘 함께 있어준 보답으로 제가 살게요”

“꽤 비싼 곳 같은데, 막 시켜도 되는 거예요?”

한준의 너스레에 한나가 피식 웃었다. 이곳에 온 후 처음 보이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저 꽤 벌거든요. 월급 말고도”

“흐응. 그래요? 어디 클럽에서 디제잉이라도 하시나?”

한나는 어느 틈에 한준과 대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과외해요. 주로 수학으로”

“그래요? 나도 학교 다닐 때 수학 과외 많이 했는데”

“요즘은 중학교 1학년이 삼각함수랑 수열은 기본이에요. 워낙 선행 학습이 보통이라”

“호오. 대단하네. 내가 가르칠 때는 고등학교 가기 전 겨울방학에 그거 해도 빠르다고 했는데”

 

마침 나온 초밥의 맛을 음미하고 있는 한나를 바라보며 한준이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요. 우리 잘 맞을 거라고”

그의 말에 한나는 초밥이 목에 걸린 듯 잔기침을 뱉고는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번에는 한준을 째려보지 않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린 채 허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매니저님에 대해 조금 물어봤어요, 점장님한테” 

한나는 여전히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회계 쪽 전문가이시라고. 그래서 잘 보이고 싶어서 폐기율 모델 만든 거였고요. 사실 꽤 고생했어요”

한나의 표정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한준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회계사 시험 준비는 안 하셨었나요?”

 

‘우리는 잘 맞으니까’

한동안 잊고 있던 말이었다. 한때 한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말. 그리고 그 설렘보다 몇 배 큰 상처로 남았던 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한나는 공인 회계사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전공인 회계학을 좋아했기에 시험 준비가 괴롭지는 않았다. 차근차근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는 기분을 즐기기도 했다. 

 

혼자서 공부하기 몇 달이 지났을 때, 가끔 들리던 회계사 준비 온라인 카페에서 스터디 모임 게시글을 봤다. 한나는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남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도 궁금해 한두 번 참석하다 보니 한나는 그 모임의 고정 멤버가 되어 있었다. 비슷한 꿈과 같은 고민을 가진 동료들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스터디 모임이 끝나고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에서였다. 유난히 한나에게 살갑게 굴던 그가 한나에게 말했다. 

-우린, 왠지 잘 맞을 것 같아

 

모르는 문제를 스스럼없이 물어오던 인상 좋은 남자. 한나와 다른 학교의 경영학과 두 학번 위라고 자기를 소개한 사람이었다. 한나는 그의 말에 가슴이 출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스터디 멤버 모두가 모이는 시간 외에도 둘은 자주 만났다. 수험생이라는 이유로 본격적인 데이트를 즐기지는 못했다. 그가 주로 한나의 학교 도서관으로 찾아와 공부하면서 함께 밥을 먹고, 가끔 학교 앞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함께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꿈을 이야기할 때 서로 마주 잡은 손은 따듯했다.

 

회계를 전공한 한나는 그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행복했다. 그의 고마워하는 얼굴이 좋았고, 간지러운 말들로 전해오는 그의 감정 표현을 사랑했다. 이해가 빠른 그는 한나의 수업 덕분에 실력이 나날이 좋아졌고 한나 역시 가르치며 복습이 되는 효과인지 모의고사 성적은 안정권에서 유지되었다.

 

둘은 처음 응시한 1차 시험에 나란히 합격했다. 한나가 온라인으로 합격을 확인하고 그에게 전화했을 때 통화가 되지 않았다. 몇 차례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을 때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고마웠어. 이제 그만 봐도 될 것 같다  

 

오래 만나온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는 한나를 같이 공부하는 동료 이상으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언제 너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냐고, 그건 네 착각이라고 했다.

 

-우리 잘 맞는다고 했던 말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그때 버스 정류장에서. 그리고 우리 이야기할 때마다

-설마.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 공부 스타일을 말한 거겠지

 

한나는 스터디 모임에 나가는 것을 멈췄다. 그의 소식은 알고 싶지 않았고, 들려오지도 않았다. 회계사 시험 준비도 흐지부지 그만뒀다. 만약 그 업계에서 일하게 된다면,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발밑 저 어두운 심연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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