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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절반 정도는 버려질 거예요

서한준의 말에 서류를 훑어보던 강한나 매니저가 뿔테안경을 오른손으로 올려 쓰며 그를 쳐다봤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 거, 듣기 안 좋은데

사실을 말한 건데요

 

한준의 답에 한나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요? 이게 다 매장 실적하고 연관되어 있는데

한준이 한나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매니저님이 물어봐주길 기다렸어요

 

한준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챘다. 한나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걸.

 

굳게 쌓아 올린 장벽 안에 숨어있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 한나의 마음 어딘가에서 무릎을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 아이가 계속 보였다. 처음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우연히 같은 종족을 만난 반가움 정도였다. 한준 자신도 높다랗게 쳐놓은 마음의 벽에서 나오지 않았다. 장벽 사이 틈으로 한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유영빈 점장이 매장 사무실로 들어가자 한나와 한준이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이 두 명의 조합은 뭔가 신선한데. 무슨 일이에요?”

여기 똑똑한 분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네요

한나의 말과 함께 한준이 태블릿을 켜 그래프가 정리된 화면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6개월간 케이크와 과일주스 만드는 데 쓰인 재료들의 일자별 매입량과 폐기율을 정리한 건데요

 

한동안 그래프를 쳐다보던 영빈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나는 조금 더 들어보라는 눈짓을 그에게 보냈다.

날씨와 객수, 음료 판매량 데이터와 폐기량의 상관관계를 모델링 하면 적정 매입 규모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대단해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한 채인 영빈을 보며 한나가 말했다.

제가 봐도 나무랄 데 없는 논리입니다. 이 정도면 현재 폐기율을 절반 정도로 낮출 수 있어요

“10% 정도까지 관리할 수 있다고요?”

영빈의 질문에 한준을 대신해 강한나 매니저가 답했다.

“10% 면 전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일 겁니다. 대단한 거죠

 

강한나가 누굴 칭찬하다니. 과장 달더니 많이 변했구나, 영빈이 생각할 때였다.

아닌데요. 7%까지도 줄일 수 있는데요

한준의 말에 한나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본사 관리회계 기준에서도 10% 수준이 거의 완벽하게 관리되는 거예요

 

정말 확신해요? 한준 씨는 7%가 가능하다고?” 영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준에게 물었다.

. 대신 앞으로 한 달 폐기율이 7%로 유지된다면 요구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한준은 강한나 매니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매니저님하고 단둘이 술 한잔하고 싶습니다

 

오늘처럼 하늘이 흐렸던 그 날, 한준은 강한나에게 마음을 뺏겼다.

 

누구인지 모를 한 여자와 매장 창가 자리에서 나란히 앉아있던 한나의 모습을 보고 발걸음을 멈춘 것이 시작이었다. 사나운 척 연기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구김 없는 얼굴로 밝게 웃던 한나의 모습에 한준은 자기 마음속 장벽 어딘가에 작은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의 등 뒤를 감싸던 따스한 햇빛이 자신의 머리 위에도 내리쬐는 듯한 온기를 느꼈다.

 

안경을 벗은 한나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그날 이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슴 언저리가 조여오는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실제로는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이었구나.

 

약하디 약한 자신의 모습을 꽁꽁 싸매고 살아왔을 텐데, 그래서 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은 어쩌면 저렇게 환히 웃을 수 있을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저 사람과 함께라면 나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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