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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인 상무는 일주일 뒤 회사를 떠났다. 약속받았다던 잔여 임기 1년의 반도 채우지 않았을 때였다.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별다른 환송식도, 마케팅 부문 구성원과의 인사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임원실의 짐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며칠 뒤 박윤수 팀장을 통해 들은 말로는 한백인 상무가 퇴임을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전이라고 했다.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나, 한 번 다시 봐야 할 이들과는 꾸준히 자리를 만들어 왔다고 했다. 지난 영빈과의 골프 라운딩도 그중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그 이야기를 해주는 박윤수 팀장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내가 윤수한테 빚진 게 많아”
지난 주말, 한백인 상무는 차창 너머로 점점 더 짙게 물들어가는 노을빛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들었겠지만, 올해가 마지막이거든. 이젠 힘도 없고, 자리만 지키는 신세지. 그런데도 윤수는, 쯧.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녀석도 빨리 다른 라인 잡는 게 나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박 팀장은 상무님 오시고 나서 평소보다 더 활기찬 게, 좋아 보이던데요”
팀장에게 숱하게 들어왔다. 박윤수 사원, 대리, 과장 시절까지 ‘백인대장’ 한백인과 함께 해온 일화들을. 깨지기도 많이 깨졌고, 죽도록 미워한 적도 있었지만 그만큼 함께 고생해서 이뤄낸 것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미우나 고우나 영원한 내 사수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술이 불콰하게 되었을 때는 ‘백인대장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백인은 후배에게 미안한 게 더 많다고 했다. 누가 누굴 위하며 살아온 것이고, 어느 쪽이 더 미안한 관계인 것일까. 한 조직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 관계로 만나,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온 것일 뿐인데. 무슨 이유로 이 두 남자는 서로에게 말 못 할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너, 기질이 꽤 센 편이라지? 주변에 적도 많고. 시기하는 놈들도 꽤 있고”
한백인에 대해 생각하느라 영빈은 막상 자기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지 몰랐다.
“너도 속이 편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네 소신을 버리진 마. 시간이 지나고, 성숙하게 되면 다 알아서 변하게 되더라”
‘나도 그랬으니까’라는 말이 이어질 거라 기대했지만 한백인은 잠시 뜸을 들인 뒤,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남한테 욕먹기 두려워서, 실수할까 봐 겁나서,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서 대충 하고 마는 건 우리 마케팅답지 않지. 영빈이 너도 엄연한 내 후배야. 쪽팔리지 않게 살아”
왠지 오랜 선배가 하는 마지막 인사 같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그게 작별의 말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영빈은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백인 상무와 그가 했던 말을, 동기들과 라운딩을 돌며 영빈은 떠올려 봤다. 그가 준 골프 공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집중하다 보니 전반보다 스코어도 좋아졌다.
그의 말대로 난 변했을까. 볼드모트라 불리던 그때보다 지금은 더 성숙했을까. 여전히 이죽거리며 성질을 긁는 조영욱에게 예전처럼 불같이 화내지는 않으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샤워실 바로 옆에서 몇 남지 않은 머리카락 위로 조심스레 샴푸질 하는 조영욱을 보며 영빈은 생각했다.
“뭘 그렇게 공치는 중간에 피식피식 웃고 그랬어?”
정지호가 운전하면서 유영빈에게 물었다. 둘의 집이 가까운 관계로, 오늘은 정지호의 차로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내가? 기억이 없는데” 영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답했다.
“그래? 난 또 한유리 생각하느라 그런 줄. 흐흐”
“너 뭔가, 말에 뼈가 있는 것 같은데”
“난 솔직히 너네 다시 잘 됐으면 좋겠어. 유리 같은 애도 없어. 예쁘지, 능력 있지. 그리고 겉으로는 세 보이지만, 속은 여려. 천상 여자라고”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야, 시간도 이른데 차 대놓고 맥주나 한잔하자. 내가 낼게” 영빈의 말에 “당근이지. 맨입으로 튀려고 그랬냐” 지호가 웃으며 답했다.
정지호가 먼저 들어간 곳은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퓨전 주점이었다. 뭘 남자들끼리 이런 데를 와, 그냥 호프집이나 가지. 영빈이 어색한 듯 내부를 둘러보고 있을 때 “여기야”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유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머, 웃겨. 지호 오빠랑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유영빈 과장님이 끼어든 거라고요”
네가 여기 왜 있냐는 듯한 황당한 표정의 영빈에게 유리가 혀를 날름, 하며 말했다. “뭐 어쨌거나. 우리 셋이 이렇게 보는 게 얼마 만이야. 옛날 생각나고 좋잖아” 정지호가 잔을 들었다.
우리 셋도 조직에서 함께 일하면서 만들어진 인연인 건가. 미워하기도 했지만 또 한편 사랑하며 살아온 거겠지. 또 언젠가는 이런 시간을 그리워할 수도 있겠구나. 영빈은 위하여!라며 잔을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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