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의 주인공은 유영빈이었다. 10번 홀부터 영빈의 스코어가 갑자기 좋아졌다. 파 세이브 세 번, 보기 네 번으로 함께 나온 넷 중에 가장 잘 쳤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냐. 아까 막걸리에 약이라도 탄 거냐”라는 동기들의 농담에 영빈은 웃으며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골프공을 다시 한번 손에 쥐었다. 4년 전, ‘백인대장’ 한백인 상무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라운딩에서 그가 준 공이었다. 방금 한백인의 말대로 영빈은 고개를 들어 골프장 풍경을 눈에 담으려 해봤다. 매일 보던 회색 건물 대신 초록색과 노란색, 빨간색이 곳곳에서 이슬을 머금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늘 기운 빠진 듯 한숨만 쉬고 다니던 박윤수 팀장이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빙긋 웃고 있었다. 동반자로 같이 온, 별로 가깝게 이야기 한 적 없던 고객분..
그가 티샷 하는 모습은 마치 동네 앞으로 마실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드라이버를 두어 번 정도 가볍게 흔들며 티 박스를 걸어가다가 바로 공을 때려버렸다. 영빈은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하얀 공을 넋을 잃은 채 바라봤다. 세 번 크게 빈 스윙을 한 후 때린 자신의 공은 오른쪽으로 사라져 OB가 된 직후였기에 지금의 장면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상무님이 절 초대하셨다고요?” LJ 그룹 카페 마케팅팀 유영빈 대리의 깜짝 놀란 표정을 보고 같은 팀의 박윤수 팀장은 씩 웃었다. “영빈이 너, 골프 연습 시작한 지 세 달 정도 됐지? 이제 머리 올릴 때도 됐어. 첫 라운딩은 어른들하고 가서 매너도 배우고 자세 교정도 받고 그러는 거야. 게다가 윗분이 다 내줘서 공짜니까 더 좋지” 2주 뒤 토요일이라고, 그동..
영빈이 친 공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며 날아갔다. 슬라이스 궤적을 그린 공은 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언덕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 지켜보던 조영욱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영빈이 스윙이 너무 뻣뻣한데? 예전에 너 일하던 스타일이랑 똑같다, 야” 어제 연습장이라도 들렀다 올 걸 그랬나. 호진은 오랜만에 잡은 골프 클럽이 아직 손에 익지 않은 듯 어색했다. LJ 그룹 동기 넷과 함께 나온 라운딩이었다. 친한 동기인 정지호와 함께 바깥바람 쐬는 건 좋았으나 동반자 중 한 명의 이름이 영 개운치 않았다. “조영욱도 온다고? 걔 있으면 싫은데” “어쩔 수 없잖아. 다른 애들 안된다고 해서 겨우 그 녀석까지 해서 네 명 맞춘 거야” 볼멘 목소리의 영빈에게 정지호가 타이르듯 말했다. “회사 회원권 어렵게 얻어서 싸게 가..
“저녁? 한 과장님 환영 회식도 아니고, 우리 둘만요?” 영빈의 표정이 오묘했다. 유리가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올지 걱정했던 것에 비해 별것 아니라 안심하는 표정 같기도, 단둘이 밖에서 보자는 말에 당황한 것인지도, 혹은 설렘에 마음이 들뜬 소년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머, 오해하는 건 아니죠? 지금까지 정리한 리뉴얼 계획을 상의하려는 것뿐인데” 피식 웃는 유리의 모습에 영빈은 속 마음이 들킨 듯 부끄러워졌다. “그래, 그러자고요. 어디로 갈까요?” “우리 자주 갔던 와인바 기억해요? 오랜만에 거기 가보고 싶네” 유리는 이미 장소를 생각해 놨던 듯, 영빈의 말에 바로 답했다. ‘내가 거길 어떻게 잊겠니.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인데’ 영빈은 유리가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돌려 쓴웃음을 지었다. 영빈..
오늘 유영빈 점장은 평소보다 출근이 늦었다. 그가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 도착했을 때 직원들은 이미 한창 개점 준비 중이었다. 영빈이 카운터를 지나갈 때 직원 두 명이 헤벌쭉 한 얼굴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봤어? 완전 여신 아니냐?” “진심. 깜짝 놀랐어. 인스타에서 튀어나온 줄” 벌써 왔구나. 영빈은 사무실로 향하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본사에서 사람이 한 명 오기로 한 날이다. 그것 때문에 밤새 뒤척였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매장 리뉴얼과 VMD 개선 프로젝트의 테스트 매장으로 방배점이 선정된 것이 2주 전이었다. 한 달 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라 영빈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일이 많아져도 어쨌든 주목받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문제는 ‘누가 담당자로 오는가’였다. 인사팀 동기 말로..
“틀렸는데. 마셔야겠네” 한나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한준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주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마셨으니까 답 알려주세요” 한나는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다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난 내가,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둘 앞에 놓인 빈 소주 병이 세 개 째였다. 한준이 돌아가며 서로에 대해 하나씩 맞춰 보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고, 의외로 한나는 싫어하지 않았다. 한준의 추측이 계속 틀렸고, 마시는 것도 그였다. “아닌데에. 매니저님은 예쁜데, 충분히이이” 얼굴 곳곳이 술기운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한준은 조금씩 혀가 꼬이고 있었다.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 안 해요? 정말?” 한준은 술에 취하면 외모답지 않게 애교를 부리는 성격이었다. 한나는 그 모습이 한..
한나는 몸을 최대한 왼쪽으로 기울였다. 서한준은 오른 편에 앉아 골똘히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한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단발머리를 뒤로 꽁지 묶고 양쪽 귀에는 잔뜩 피어싱을 한, 꽤나 놀 것처럼 보이는 이 밉상인 녀석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코노미야키랑 참치 타다키, 괜찮으세요?” 한나가 대답 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자 한준은 “그럼, 이렇게 할게요”라고 스스로 답했다. “아 그리고, 술은 하이볼로 한 잔씩 주세요” 혼자 알아서 주문을 마친 한준은 한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한나는 이 녀석을 한 대 쥐어 패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준이 한나를 데리고 간 곳은 가로수길의 조그만 이자카야였다. 모든 좌석이 바 형태로 되어 있어 나란히 앉을 수밖..
“오늘도 절반 정도는 버려질 거예요” 서한준의 말에 서류를 훑어보던 강한나 매니저가 뿔테안경을 오른손으로 올려 쓰며 그를 쳐다봤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 거, 듣기 안 좋은데” “사실을 말한 건데요” 한준의 답에 한나가 팔짱을 끼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 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요? 이게 다 매장 실적하고 연관되어 있는데” 한준이 한나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말했다. “매니저님이 물어봐주길 기다렸어요” 한준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챘다. 한나가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걸. 굳게 쌓아 올린 장벽 안에 숨어있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 한나의 마음 어딘가에서 무릎을 감싼 채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 아이가 계속 보였다. 처음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우연히 같은 종족을 만난 반..
“후회 없는 거죠?” “없습니다” 카페 토라세 방배점 사무실, 유영빈 점장과 강한나 매니저의 표정이 굳어 있다. “앞으로 번복할 수 없다는 것, 알고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이게 제 선택입니다” 한나가 사무실에서 나간 후 영빈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설마 하긴 했지만, 진짜일 줄이야. 영빈은 바로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어, 점장님. 그래, 면담은 마치셨나요?” “그래. 면담 결과는…” 본사 인사팀 동기인 정지호가 영빈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이미 예상하고 인사 발령지 다 고쳐 놨는데. 너랑 전화하고 나서 바로 결재받으러 가면 돼” “그래. 강한나 과장은 본사 복귀 대신, 방배점 매니저로 남습니다” 영빈은 졌다는 표정으로 방금 마친 면담 결과를 인사팀에 확정 지었다. “그런데 용케 윗선..
개장 전 아침, 카페 토라세 방배점 사무실의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 유영빈 점장과 강한나 매니저를 비롯한 매장 직원 모두가 모여 있었다. “오늘 아침 조회는 안 좋은 소식으로 시작해야겠군요” 영빈은 사무실 중앙의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 매출 신장을 기록하던 우리 매장이, 지난달부터 매출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나는 뿔테안경 오른쪽을 두드리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었고, 몇 명의 직원들은 분위기에 동참하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민주를 비롯한 몇몇만 천진난만, 혹은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강 매니저님. 이유가 뭘까요?” 영빈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한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어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