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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차갑지만 상쾌한 겨울바람이 영빈의 몸을 한차례 휘감았다. 어두운 밤하늘에서 소박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영빈은 가게 맞은편의 담벼락 쪽으로 걸어가며 담뱃불을 붙였다. 빈속에 계속 들이킨 술 때문에 정신은 몽롱했으나 오히려 속은 가벼웠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들자 희미한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자신의 입김과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얼굴에 닿는 작은 눈송이의 느낌이 청량했다.

 

유흥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골목 초입에 위치한 음식점이라 주변은 조용했다.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가게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해온 방배점 가족들이다. 함께 켜켜이 추억을 쌓아온 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영빈은 다시 한번 쓸쓸해지는 기분을 지워낼 수 없었다.

 

영빈이 담뱃불을 끄고 다시 들어가려 할 때 가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민주였다. 그녀는 발걸음을 몇 번 뗀 후 무엇을 찾는 듯 주변을 살폈다. 곧 가로등 아래 그림자에 가려있던 영빈을 발견한 민주는 한참 동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친구와도 이제 이별이구나’

민주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걸음씩 걸어왔다. 눈 위에 새겨진 영빈의 발자국 옆으로 나란히 그녀의 발걸음이 하나씩 아로새겨졌다. 다가오는 민주를 영빈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민주 씨, 괜찮아요? 얼굴이 빨갛네”

“네. 저 오늘 많이 마셨어요”

영빈 바로 앞에 선 민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키 차이가 제법 나서 민주의 정수리가 영빈의 가슴 부근에 미칠 정도였다.

“오랫동안 말 못 하다가 오늘에야 민주 씨 그만둔다고 밝혀서 놀란 눈치던데. 다들 서운해하죠?

“그래도 응원해 주고 힘 나는 말 많이 해주셨어요. 감사했어요”

“그럴 거예요. 모두 민주 씨를 좋아했으니까”

영빈은 눈도 깜짝이지 않은 채 자신을 마주 해오는 민주의 시선을 피하며 담배 한 대를 더 피우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점장님은요, 점장님도 절 좋아하나요?

민주가 영빈을 향해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둘의 몸이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영빈은 담배를 집으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빈 채로 밖으로 꺼냈다.

“당연히 좋아하죠. 우리 매장에서 민주 씨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민주가 내뱉는 입김에 달콤한 술 냄새가 묻어 있었다. 민주의 동그란 눈동자에 영빈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영빈의 눈빛에 부끄러웠는지 민주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거 말고요. 아끼는 아르바이트 생이라거나, 챙겨주고 싶은 어린 동생이라거나, 그런 거 말고요”

영빈은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민주 씨, 혹시”

“지금 점장님이 생각하는 그런 좋아하는 거요”

영빈은 아무 말 없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민주는 그의 한숨에 담겨 있는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하지 못할 말.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말. 이대로 가슴에 묻어 두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그리고 아픈 그 말.

 

“점장님을 좋아해요. 아주 오래전부터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민주가 고개를 다시 들어 영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이 가로등 불빛을 머금고 있었다. 민주는 양팔을 벌려 영빈을 힘껏 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영빈은 한껏 안겨오는 민주를 마주하여 함께 감싸 안아줄 수 없었다. 한 번은 이렇게 될 일이었던 것일까. 이러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을까.

“점장님, 몰랐죠? 내가 얼마나 점장님을 좋아하는지”

두 손을 가만히 내린 채 서 있는 영빈의 가슴에 얼굴을 꼭 붙인 채로 민주가 말했다. 민주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따듯한 온기가 영빈이 입고 있는 얇은 니트를 통해 몸으로 전해졌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요?

“그럼 알고 있었다고요? , 거짓말. 알면서도 그럼 모른 척했다고요. 그게 더 나빠요”

아이처럼 영빈의 가슴에 더 꼬옥 안겨오는 민주의 행동에 영빈은 그제야 작게 미소 지었다. 해줘야 할 말이 이제 생각났다.

“내가 아무리 아저씨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눈치 없지 않아요. 그리고

영빈은 한 손을 들어 민주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난겨울, 민주의 머리를 처음 쓰다듬었을 때가 기억났다. 그때도 이렇게 눈이 내렸었나. 지금처럼 가로등 아래였었지.

 

민주 씨를 볼 때면 설렜어요. 하지만 그게 좋아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니, 좋아하는 마음까지 가지 않도록 내가 막았다고 해야겠네요. 민주 씨를 좋아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민주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던 영빈의 손을 내려 꼭 마주 잡으며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좋아지면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 거잖아요. 뭐가 그렇게 복잡한데요

민주의 눈망울은 애절하게 영빈을 갈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를 바라보는 영빈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게 있어요. 어른의 사정이라고 해야 하나. 민주 씨는 아직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잖아요. 나 역시도 그렇고. 일하면서 갖게 되는 동경과는 다른 걸 거예요. 민주 씨 마음 모르지 않았어요. 그 마음 너무 예쁘고 설렜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으로 가서는 안되는 거예요

영빈의 미소가 품고 있는 따듯하지만 단호한 마음이 민주에게 오롯이 담겨 전해졌다. 민주는 그게 아팠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이렇게 자기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더 이상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머리 쓰다듬어 주세요

민주가 활짝 웃으며 영빈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이 사람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언젠가 다시 이 사람의 앞에 섰을 때, 그때는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될 수 있기를.

어디서든 잘 할 거예요, 민주 씨는

영빈이 민주의 머리에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이제 이런 거 말고, 악수해요. 우리

민주가 두 눈을 감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가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민주의 머리가 눈에 젖을까 영빈은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 듯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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