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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J 그룹 본사 1층 로비는 퇴근하며 나오는 사람들로 한창 붐비고 있었다. 유영빈 팀장은 구석에 서서 만나기로 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출입문 쪽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게 얼마 만이야, 만호 씨, 아니지. 이제 정만호 대표님이라고 불러야겠네. 하하”

“어휴, 점장님. 부끄럽게 왜 그러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만호는 아직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영빈을 점장님이라고 불렀다. 그와 함께 있던 푸드 개발 부문의 전도일 셰프가 “아니, 아직도 점장님이라고 하네”라며 껄껄 웃었다.

그러게요. 방배점에서 있던 때가 벌써 2년 전이네요영빈의 눈가에 그리움이 스쳐 지났다.

 

“오늘 미팅은 잘 하셨어요?

밖으로 걸어 나가며 영빈이 한 물음에 전도일이 만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느낌이 좋아, 이번 메뉴도 괜찮거든. ‘만호네 집’ 2탄도 대박 칠 것 같은 예감이랄까?

호오, 그래요? 메뉴가 뭔데요

이번에는 불고기야. 그런데 국물은 거의 없고, 너비아니에 조금 더 가깝다고 할까?”

그것도 만호 씨 오리지널 레시피인가?”

만호가 쑥스러운 듯 오른뺨에 보조개가 패인 얼굴로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아니에요. 이번 거는 거의 도일 셰프님이 만들어 주셨어요

에이, 무슨 소리야. 나야 아이디어만 줬지, 이 친구 손맛으로 완성됐다고

도일이 다시 한번 만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쳐줬다. 기특한 후배를 대하는 선배의 몸짓이었다.

 

영빈과 민주가 카페 토라세 방배점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만호도 일을 그만뒀다. 전도일 셰프가 본사 푸드 개발 부문에서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자며, 정규직 전환을 약속하는 제안을 해왔음에도 만호는 거절했다.

그때 이 친구가 했던 말이 뭔지 알아?”

전도일이 소주 잔을 입에 털어놓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빵은 당분간 쳐다보기도 싫어요,라고 했다고. 그래도 너무 아깝더라고. 이 친구가 계속 생각이 나는 거야

 

만호는 수줍은 표정으로 충분히 끓여진 매운탕을 국자로 덜어 도일과 영빈의 그릇에 덜어내 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고기만 만져대서 근처도 가기 싫다는 도일의 말에 셋은 그가 추천하는 대구 매운탕 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그만두고 한 달 뒤인가, 강한나 점장한테 물어봐서 이 친구 부모님이 하는 고깃집을 그냥 찾아간 거야. 한 번 더 꼬셔보려고

그때 만호네 집프로젝트가 시작된 거군요영빈이 이제야 이해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전도일이 찾아간 날 만호는 단체 손님의 요청으로 제육볶음을 만들었다. 당분간은 부모님 가게를 도우며 지내고 싶다고 그의 제안을 재차 거절한 만호가 그래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식사하고 가시라고 내어놓은 제육볶음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 맛을 잊지 못해 계속 찾아오던 전도일은 어느 틈에 만호의 일은 잊었다. 그의 두 번째 제안은 이 맛을 이대로 숨겨두기는 너무 아까우니, 이걸 밀키트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회사에서도 집밥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밀키트 개발에 힘을 쏟고 있던 때였다. 더 이상 거부하기도 미안했던 만호는 잠깐 동안의 일이라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승낙했고, 몇 달 뒤 출시된 만호네 집 제육볶음은 그해 LJ가 내놓은 밀키트 중 독보적인 차이로 매출 1위를 기록했다.

 

만호 씨가 그만뒀던 큰 그림이 있었던 거구나. 하하. 다시 한번 축하해

아직도 얼떨떨해요. 그렇게까지 인기가 많을 정도는 아닌데

만호의 잔에 술을 따르며 영빈이 웃었다. 전해 듣기로는 만호네 집은 회사에서 밀키트 전문 브랜드로 키울 계획이고, 그에 따른 로열티 수입도 상당할 터였다.

 

, 오늘 뵙자고 한 게 다름이 아니고요

만호가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 영빈과 전도일에게 건네며 말했다.

, 결혼합니다

 

청첩장 가운데에 어린 시절 친구로 시작된 인연, 이제 부부의 약속을 맺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정만호와 김예지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었다.

 

. 오늘은 축하할 일이 끊이질 않네. 예지 씨면, 맞지? 음식점에서 같이 일하던 동네 친구

영빈이 청첩장을 펼쳐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듯 놀라며 말했다.

만호가 입가에 보조개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제육볶음 맛을 못 잊어서 드나들 때부터 어쩐지, 둘 사이 분위기에 뭔가 있는 것 같았어

전도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친구가 여복이 많은 것 같아. 왜 예전에 방배점에 있을 때 우리 쪽 한 번 찾아왔었잖아? 케이크 레시피 때문에. 그때 같이 왔던 여자분하고도 잘 어울렸는데 말이야. 키 작고 귀엽게 생겼던

, 민주 씨요

민주의 이름을 말하는 영빈의 얼굴에 그리운 시절의 기억이 드리워졌다. 만호 역시 아련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만호 씨 곁에는 이미 좋은 사람이 있는걸요. 예지 씨의 마음을 더 소중하게 대해주세요

그해 겨울 민주의 방배점 마지막 날, 매장에서 나와 작별의 악수를 나눌 때였다. 옅은 불빛이 내리고 있는 가로등 아래에서 민주가 해줬던 말이 만호는 기억났다.

전해지지 않는 마음을 예지 씨도 가지고 있을 거예요. 만호 씨에게 닿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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