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편지

은고랭이 2022. 12. 6. 16:35

네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건 내가 죽는데 성공했다는 거겠지.

눈에 띄는 곳에 놓아 놨으니 어렵지 않게 찾았기를 바란다.

 

우선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어찌 됐건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되도록이면 고통스럽지 않으면서도 내 주검이 흉해 지지 않을 방법을 나름 열심히 찾아봤어. 범죄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발견되기는 싫었거든. 내 얼굴에 괴로운 기색이 많지 않다면 별로 힘들지 않게 떠났으리라 생각해도 된다. 네가 그걸 신경 쓸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널 기억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너와 보낸 시간과 같이 갔던 장소, 함께 먹었던 음식들을 기억하보니 언제부턴가는 널 기억했던 나를 기억하고 있더라. 기억을 또 기억한다는 게 참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론 또 고마워졌어. 그리 똑똑하지 못한 내 머릿속에도 어쩌면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는지 경이로울 정도였다.

 

살아온 게 덧없진 않았다. 만약 다시 한다고 해도 난 똑같은 삶을 살 거야. 너를 안아 재우고, 너를 씻기고, 네 입에 밥을 넣어주는 인생을 다시 한번 시작할 거야.

하지만 네게 잘못한 일들만큼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그 하나하나는 콘크리트 벽에 깊숙이 박힌 굵은 쇠못처럼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면 좋겠다.

 

처음이어서 부족했다는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야. 다만 끝내 내버리지 못한 나란 사람의 결점과, 넘을 수 없던 한계 안에서 그래도 힘을 쥐어짜 노력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 의지가 아닌 나조차 어쩌지 못한 그 무엇 때문이었다고 이해해주길 바래. 이것도 어쩌면 구차한 말장난으로 들리겠구나.

 

뒷정리는 간단할 거야.

빈소는 차리지 않아도 돼. 널 제외하곤 찾아올 피붙이도 없으니 굳이 돈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지. 그 외 알려야 할 사람들에게는 이미 예약 발송으로 인사말을 설정해 놨다. 찾아올 필요 없다고 당부했으니 연락 올 일은 아마 없을 거야.

그리고 네게 와달라고 한 시간과 비슷하게 또 한 명을 불러놨다. 그가 내 몸을 처리할 거라서 넌 크게 신경 쓸 것 없어. 불법적인 절차 같은 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요즘은 대행 도우미로 안되는 일이 없더라.

 

법적 효력이 있는 유서와 함께 상속 절차를 챙겨줄 변호사가 네게 연락해 올 거다. 설명을 듣고 난 후 서명 몇 번만 하면 되도록 해놨으니 이것도 크게 번거롭지는 않을 거야. 나름 열심히 벌었고 되도록 아껴 써온 것치곤 성에 차지 않지만 앞으로의 네 생활에 무리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널 사랑했다.

 

고마워

좋아해

사랑해, 이 세 가지 말.

 

아주 오래전, 아직 말이 입에 붙지 않은 네 귀에 가만히 속삭이던 때가 기억나는구나.

그리고 언젠가는 이때를 기억하겠구나,라고 생각하던 내가 또 기억나는구나.

 

내가 가진 기억들이 지금까지 날 살게 해줬다는걸, 이제는 알고 있다.

내 삶을 가득 채워온 이 모든 기억을 만들어 준 너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것도  (0) 2022.12.24
나는  (0) 2022.12.08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최종)  (0) 2022.11.15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54)  (0) 2022.11.15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53)  (0) 2022.11.14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