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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제 내게 남아있지 않아요]
핸드폰 진동이 울리며 루카스 이름이 화면에 떴다. 수진에게 연락할 때면 그는 언제나 메시지 대신 전화나 영상 통화를 했다. IT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 너무 옛날 방식 아니냐고 농담처럼 놀릴 때면 “당신 목소리를 듣고 싶고, 당신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게 좋기 때문이야”라고 수줍은 표정으로 말하곤 했다. 일할 때는 몇 개의 메신저를 번갈아 사용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수진이었다.
지금도 점심 식사는 어땠는지,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는지,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등 별것 아닌 내용이었지만 통화하는 내내 그의 들뜬 기분이 전해왔다. 지금까지 항상 변함없는 사람. 늘 이렇게 날 사랑해 줄 것 같은 사람. 그를 생각할 때면 수진은 환한 햇살이 눈이 부셔 잠에서 깨었는데도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은 듯한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또 한 번 자리 잡게 될 줄이야. 다시는 사랑을 마음속에 싹 틔우고 키워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수진의 첫 번째 선택 때문에 일그러지고 무너져 버린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사랑이란 단어는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금단의 대상이었다.
그때는 알고 있었을까. 이 위험한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버릴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마음속으로 들어와 버린 그 사람을 내버릴 수 없었다. 이미 내어준 자신의 마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내겠다는 오기가 생겼던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수진은 허락되지 않을, 용서받지 못할 사랑에 기꺼이 모든 걸 바쳤다.
아이가 생긴 걸 알게 된 때는 둘이 처음으로 입을 맞춘 후 네 달이 지나 개나리가 꽃을 피우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테스트 키트로 먼저 확인한 후에 수진은 집과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산부인과에 혼자 찾아갔다. 기뻐하는 건지 당황한 건지, 둘 다 인지 모를 복잡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여의사는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낳자. 그리고 좋은 부모가 되어 셋이 사랑하면서 살자.”
영호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말했다. 사제복을 입은 그의 입에서 부모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내심 반응이 어떨지 불안했던 마음이 따스한 행복으로 변해가고 있음에 수진은 기뻤다. 하지만 그래도 될까. 허락되지 않은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축복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같이 떠나자. 지금 당장은 우리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기 어려울지라도, 아이와 함께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부모님도 받아주실 거야.”
잠시의 환희 뒤에 수진의 얼굴에 그리워진 어두움을 눈치챈 영호는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하지만 단호한 의지를 담아 잡으며 말했다.
“교구청에 면직 서류를 넣을 거야. 이제 다른 직업을 찾아야지. 그러니 수진이도 더 이상 죄짓고 있다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이제 바오로 신부가 아니라 그저 한 남자인 손영호의 아내가 될 테니까.”
수진은 사정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걱정 마시라는 편지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둘이 부산행 열차에 타고 사라진 후 옥수동 본당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다. 인사이동 철이 아님에도 새로운 보좌 신부가 부임한 배경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고 거기에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여대생의 가출 소식이 섞이며 차마 입 밖으로 내기 힘든 추문으로 이야기에 살이 붙어 갔다. 수진의 아버지는 가까이 지내던 이웃 신자와 멱살을 잡는 드잡이를 몇 번 한 뒤 영영 성당에 발을 끊었다.
서울에서의 난리와는 달리 영호와 수진의 일상은 평온하고 아늑했다. 부산에 자리 잡은 둘은 바다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 집을 얻었다. 작은 마당이 있는 단층 가옥이었는데 대문 옆에 큰 아카시아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며 무성하게 자란 푸른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해안선이 펼쳐 보였다.
영호는 집 근처 대형 마트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해서 카트를 정리하거나 상품 팔레트를 옮기는 일을 했다. 몸을 쓰는 일은 처음이어서 며칠 동안 온몸이 쑤시고 걸렸다. 퇴근 후 돌아와 방에 엎드린 그의 등과 허리를 자근자근 밟아주며 수진은 고생한다며 울먹였으나 그 모습이 귀여워 영호는 쿡쿡대며 웃었다.
뱃속의 아이는 잘 자라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산부인과를 찾아 초음파 영상을 확인할 때마다 작은 콩알 같던 생명체는 몰라보게 커졌고 가을에 접어들 무렵에는 제법 팔과 다리, 머리 모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호는 동사무소에 계약직으로 취업했다. 면접 때 그의 이력서를 읽어보던 동장의 눈이 커졌다가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이력서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가 천주교 신자이고 무슨 사연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한때 사제였던 사람이니 믿을 수 있겠다 여긴 건 몇 달이 지나 알게 되었다.
함께 먹은 저녁 상을 물리고 나서 영호와 수진은 저녁 산책을 나갔다. 조용한 주택가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를 맞대고 있는 꽤나 번화한 길이 나왔다. 연인들이 많이 찾는 카페며 일식 주점이 늘어선 곳을 영호와 수진은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걸었다. 얕은 경사가 진 바다를 접한 길을 산책하고 돌아와서 수진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낮은 숨소리를 듣다가 영호는 살며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서 작은 의자에 앉아 작은 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매일 꽤나 긴 시간을 들여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지켜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걸 수진은 몰랐다.
수진의 산달이 가까워졌을 때 첫눈이 내렸다. 부산에서는 눈이 흔하지 않았기에 동사무소 직원 모두가 신기한 듯 창밖을 바라봤고, 눈을 치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며 사람들이 당황할 때 영호가 창고에서 널빤지와 빗자루 봉을 조립해서 넉가래를 만들었다. 출입문 앞에서 눈을 밀어 치우는 그의 능숙한 행동에 “서울에서 온 사람이라 다르네”라는 감탄이 나왔고 영호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신학교 때 눈을 치우는 건 신입생의 몫이었기에 사실 신부들은 눈 치우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신학생 시절 친구들의 얼굴과 서품 받을 때의 마음가짐을 영호는 오랜만에 떠올려 봤다. 사제를 그만둔 후의 근황은 가까운 몇에게만 알렸을 뿐,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고 단톡 방에서도 나왔다. 성직자의 삶을 포기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시간을 돌린다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하리라.
다만 가끔 그의 가슴을 옥죄어 오는, 정말 이대로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불안함은 떨칠 수가 없었다. 진정으로 나는, 우리 식구는 행복을 허락받을 수 있을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해 겨울은 부산에 유례없는 폭설이 내린 날이 많았다. 아기를 낳은 날도 그랬다. 발목까지 덮일 정도로 눈이 쌓인 날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쌓인 눈이 채 녹기 전에 영호와 수진을 떠났다.
기쁨이. 영호가 지어준 아기의 태명이었다. 우리에게 찾아와 준 기쁨이자, 앞으로도 늘 기쁘게 살아가길 바라며 만든 그 이름은 그러나 슬픔으로 남았다. 태명은 기가 센 단어를 골라야 한다고 하던데. 태풍이나 무럭이처럼. 그렇게 했다면 달라졌을까. 기쁨이가 세상에 머무른 건 고작 이틀이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인큐베이터 안에서 눈도 뜨지 못한 채 누워있는 아기를 보며 영호는 기도하듯 두 손을 맞잡고는 자책했다.
아주 희귀한 경우라고 했다. 초음파에서도 찾아낼 수 없는 아주 작은 이상이 태어난 아기의 호흡을 방해했다. 약 10만 명 중에 한 명 정도 있을까 싶은 증세입니다만, 정말 안타깝게도 현대 의학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슬픔에 빠질 겨를도 없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젊은 부부 앞에서 의사가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기쁨이는 태어난 곳에서 눈을 감았다. 수진은 산후조리를 위해 누운 병원 침대에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아기의 출생 신고를 하기도 전에 사망 신고서를 작성한 것은 영호였다. 제대로 된 서류도 아니었다. 병원에 기록을 남기기 위한 한 장짜리 종이에 출생 시기와 사망 시기를 적고 작성자가 서명을 하면 끝이었다. 정작 죽은 아기는 자신의 이름도, 생일도, 주민등록번호도, 그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였다는 기록 따윈 없는, 무심하고도 싸늘한 한 장의 종이일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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