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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털고 계단을 내려갔다. 폐점 한 시간 전, 서점은 비 때문인지 한산했다. 호진이 예상한 대로였다. 이 시간의 풍경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드문드문하고, 챙겨 온 중고책을 팔려고 늘어선 줄은 없었다. 직원들의 얼굴엔 하루 일과의 피곤이 누적되어 있으나, 이제 또 하루 넘겼다는 안도감이 편안하게 걸쳐 있었다. 공간을 느슨하게 채우는 노곤함과 적막함에 호진 또한 느긋해질 수 있었다.  

 

손님이 아무도 없진 않았다. 만화책 서가와 동화책이 있는 곳에는 한두 명 정도 있었다. 어린이 서적 코너에서 종이에 적어온 리스트를 유심히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책 이름을 검색하는 사람은 대개 엄마들이었다. 학교에서 준비해오라고 한 ‘학년별 권장도서'를 찾고 있을 것이다. 호진 역시 아들이 저학년일 때 몇 년 간 했던 일이기에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이들 책이라고 해도 열 권 정도를 사려면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어차피 한 번 읽고 지날 책이기에 상태 좋은 중고를 고르는 것이 훨씬 나았다. 코로나 이전에는 늦은 시간까지 작은 어린이용 책상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스스로 고른 책을 열심히 읽는 모습은 볼 때마다 흐뭇했다. 가끔은 영어책이나 아이들이 읽기엔 버거워보이는 글로 빼곡한 책을 읽는 아이들을 보면 작은 질투심을 느끼곤 했다. 

 

호진의 아들이 좋아한 쿠키런 시리즈나 마법천자문은 비닐로 밀봉되어 사기 전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만화책이었기 때문이다. 틈날 때마다 아들을 서점에 데려가려 했던 호진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책에 익숙해지고, 책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간다면 언젠가는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될거라고 믿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호진이 국민학교 일 학년 때, 여느 아이들처럼 삼십 권짜리 문학전집이 생겨났다. 아마도 엄마가 방문판매로 산 것이었을테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책이 너덜해질 때까지, 권 별로 오십 번 이상은 읽었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하는 어느 여름밤, 엄마는 거실에서 드라마 ‘인현왕후'를 보고 있었다. 열어놓은 방문 사이로 전인화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호진은 방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호진은 가끔 엄마에게 말했다. 그때 사주신 ‘웅진 이원수 아동문학전집'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이제 아들은 어린이용 만화책을 졸업했다. 그리고 바로 호진을 뛰어넘었다. 호진이 중학교에서야 입문하게 된 ‘제대로 된 만화책'의 세계로 바로 접어든 것이다. 중고서점의 장점을 이제는 한껏 누릴 수 있었다. 블리치, 나루토,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같은 만화책은 가끔 이가 빠져있기는 했지만 항상 몇 권씩 꽂혀 있었다. 얼마든지 골라서 읽을 수 있었다. 이젠 앉아서 읽을 수 있는 자리가 없는데도 한 시간 넘게 서서 만화책에 몰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 호진은 기가 막히면서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곤 했다. 이것도 몰입일거야. 몰입하는 대상이 아직 공부는 아니지만, 무언가에 빠지는 건 좋은 거니까. 이렇게 오래 서 있는 건 육체노동인데, 그래도 운동은 되겠구나. 만화책을 대충 다 읽고 나서 “아빠, 이제 가자”하며 아들은 만화책을 본 것을 엄마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호진은 종이로만 된 책이면 뭐든지 읽는 게 좋다고, 괜찮다고 이야기해 줬다. 

 

특별히 찾는 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책을 골라 읽지 않아도 좋았다.  TV만 보며 저녁을 보내기 답답할 때, 밤마실 코스로 부담없이 그저 서점을 거닐었다. 흔들흔들 걸음을 옮기다가 좋아하는 작가의 익숙한 책, 그러나 읽은 지 오래된 책을 펼쳐보기도 한다. 개정판의 저자 서문이 어떻게 바뀌었나 훑어보기도 했다. 가끔은 서가의 구조가 바뀐 것이 느껴졌다. 여행 서적은 코로나 상황 때문인지 면적이 많이 줄었다. 대신 ‘나를 위한 마음 챙김'같은 심리학 책이 눈에 띄게 늘었다. 다들 힘든 상황인 것이다.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의 종류가 늘어났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들은 꾸준했고 직장인이 시간을 조금씩 쪼개 썼다는 책들도 많아졌다. 시보다는 길고, 산문보단 짧은 글들이 책으로 엮여 나오기도 했다. 그 책에는 글자 없는 빈 공간이 넓은 페이지가 많았다.  호진과 같은, 그저 글 쓰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을 읽을 때면. 호진은 아주 잠깐 가슴이 뛰었다. 질투가 났다. 이런 건 나도 쓰겠다.

 

얼토당토 않은, 웃긴 생각이었다.‘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는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가. 글의 주제와 플롯의 치밀함을 떠나 책 한 권으로 엮을 정도 분량의 글을 써낸다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호진도 알고 있었다. 재능을 떠나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꾸준함을 갖춘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한 번 해볼까'하는 마음과 ‘실제로 한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글을 써보려 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은 경험했을 것이다. 

 

지친 하루를 마친 저녁, 식탁에 앉아 소설을 쓴다는 ‘키친 테이블 노블'. 풍경은 고즈넉하고 그럴싸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가야 하는 글쓴이의 막막함은 달콤하지만은 않다. 먹고 살기 위한 하루의 ‘책임'을 마친 후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즐거움임과 동시에 한 편으로는 또 하나의 노동이기 때문이다. 글이란 것은 슬슬 써 내려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때문에 호진은 중고 서점에 꽂혀있는 책들의 저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들은 ‘이제 그만할까’라는 유혹의 언덕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란을 읽다 보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진은 20km 코스에 참여한 아마추어 러너일 뿐이었다. 풀코스 러너들은 이미 반환점을 넘어 속도를 내 호진의 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도 전업 작가는 아님에도 꾸준히 써왔다.  

 

퇴근 후 집 앞 카페에 들린다. 잘 써질 때도 있지만, 아닐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조그만 블루투스 키보드를 펼치고 폰을 그 위에 걸쳤다. 자판을 두드린다. 무엇이든 쓰고 보자. 마음에 드는 문장이 찾아질 때까지 문단의 구성이라도 만들어놓고 보자. 그렇게 호진은 ‘투썸 플레이스 노블'을 한 페이지씩 채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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