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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컴택 광고주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무실 입구 옆 모니터에 환영 인사 문구가 잘 떠 있나 호진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폰트가 좀 촌스럽지 않아? 좀 엣지있는 폰트로 바꿀까?”
손병환 차장이 호진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팀장님, 광고주보다는 영어로 클라이언트라고 하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손 차장이 알아서 챙겨줘. 난 회의실 점검하러 갈게”
호진은 대회의실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오경근 과장이 회의실 중앙의 빔 스크린 화면에 띄워진 내년 커뮤니케이션 전략 제안서의 페이지를 넘기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팀의 막내 유진은 테이블 위에 음료수와 다과를 준비하고 있다. 이미 병환이 몇 차례에 걸쳐 잊지 말고 매실 음료로 준비하라고 이야기해 놓은 뒤였다.
“이 과장은 어딨지?” 미팅 시간 20분 전이었다. 모두가 바쁜 와중에 건식이 보이지 않아 호진이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뭐 알아서 시간되면 오겠죠”
경근이 영상 광고의 레퍼런스 화면 크기를 조절하다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잠시 뒤 이건식 과장이 장희철 상무와 회의실로 들어왔다. 중요한 미팅 전에는 긴장을 풀기 위해 담배를 피는 것이 호진의 사수였던 시절부터 희철의 습관이었다. 희철이 “자! 며칠 간 심혈을 기울인 내년 농사 결실을 맺어야지”라고 말하자 건식은 “그럼요. 상무님이 다 만드셨잖아요. 잘 안될 수가 없죠”라고 말을 거들었다. 호진이 힐끗 건식을 노려봤다. 팀원들 모두 미팅 준비 막바지에 정신 없는 때에 건식은 흡연실에 다녀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오늘 PT는 호진의 팀이 관리하는 가장 큰 광고주인 컴택의 광고 대행을 내년까지 이어갈 수 있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했다. 만약 오늘 광고주의 반응이 좋지 않다면 다른 대행사와 경합해야 하는 경쟁 PT로 이어질 것이고, 수성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부담될 수 밖에 없었다. 호진에게는 8년 만에 광고업계로 돌아온 뒤 첫 대형 프로젝트였고 그간 공백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희철이 여러모로 호진을 챙겨줬다. 컴택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줬고, 제작 부서와 마케팅 플래닝 부서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임원인 자신이 주재한 미팅도 여러 차례 진행했다. 아이디어 미팅에도 참여해서 호진의 팀원들과 늦은 시간까지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마치 신입사원 호진과 함께 했던 대리 시절 같아 좋았다고 둘이 소주 한 잔 하는 자리에서 희철은 웃으며 말했다. 호진은 그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결과에 대한 부담에 마음이 무거웠다.

기획 2팀은 팀장인 호진을 제외하고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임 팀장은 광고 대행사 일을 더 이상 못 하겠다며 그만뒀다고 했다. 그 공석에 호진이 복귀한 것이었다. 팀원들과의 첫 대면 자리에서 호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팀의 막내인 정유진이었다. 호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그의 말에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답네. 반짝이는 유진의 눈을 보며 호진은 생각했다. 두 명의 여자 팀원 중 다른 한 명인 김다희 대리는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다이어리에 열심히 적고만 있었다. 호진이 인사말과 함께 본인의 업무 스타일에 대해 설명을 마친 후 팀원의 질문이나 의견을 물었을 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다희였다.
“팀장님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광고 전략과 크리에이티브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미디어를 선정해서 타겟 도달율을 높이다는 거지요?”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이야기한 것과 정확히 정반대되는데. 호진은 속으로 당황했다.
“음. 김대리 이야기와 맥락은 같다고 할 수 있겠죠. 광고 메시지도 미디어의 성격과 맞아야죠. 그게 요즘도 쓰는 말일지 모르겠는데, 미디어 크리에이티브라고 할 수 있겠죠”
“여하튼 대선배님이신 베테랑 팀장님이 오셔서 기대됩니다. 사실 저희는 대행사 입장 밖에 모르니까요. 광고주 경험도 있으신 팀장님께 배울게 많을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경근 과장이 상황을 수습하는 말로 이쯤에서 회의를 마무리짓고자 생각하는 호진을 도왔다.눈치가 빠른 친구였다. 희철이 호진에게 기획 2팀에 대해 먼저 설명해 주며 에이스라며, 잘 키워보라고 조언해준 경근이었다.

이번 PT를 준비하여 희철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제안서의 기본적인 뼈대를 호진이 잡으면 더 풍부하게 살을 붙이고 페이지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은 경근의 몫이었다. 혼자서 했으면 버거웠을 준비가 경근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마무리 되었다. 팀의 또 다른 과장이자 경근과 같은 연차의 이건식 과장은 정반대였다. 아이디어 미팅에 가져오는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를 차지하고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몇 번인가 호진이 한 마디 할까 싶을 정도로 부아가 치밀었으나 참았다. 어쨌든 이 주일의 준비 시간은 지났다. 결전의 날이 찾아온 것이다.

호진의 전화기에 컴택 강혁 팀장의 이름이 떴다. 2시 55분이었다. 미팅 5분 전 광고주가 호진의 회사인 스팅애드에 도착했다.
“네 강 팀장님, 준비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디쯤 오셨어요?”
“지금 엘리베이터 탑니다. 상무님 모시고 곧 올라가니 출입문 앞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긴장한 표정으로 서있는 호진과 달리 희철은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컴택과의 대행이 4년 째에 접어들고 있었고 광고주로 첫 영입한 것도 희철 본인이었다. 지금까지 광고주와의 유대감도 남달랐을 것이다. 호진은 컴택의 마케팅 임원인 오쌍진 상무를 신임 팀장으로 인사차 방문 때 잠깐 봤을 뿐, 오늘이 제대로 된 첫 제안이었기에 여러모로 생각이 많은 상황이었다. 잘해야 할 텐데. 호진이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짤막한 키에 다부진 체형의 군인과 같은 짧은 머리를 한 오쌍진 상무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먼저 발을 내딛었고 그보다 머리 두 개 정도 얹은 큰 키의 강혁 팀장이 두 손을 앞으로 겹쳐 모으고 따라 나왔다. 마치 사극 드라마에서 왕의 뒤를 졸졸 따라 나오는 내시의 모습 같았다. 희철과 쌍진이 반갑게 악수하고 회의실로 이동하는 동안 호진은 강혁 팀장과 조그만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뒤를 따랐다.
“매실 음료 준비하셨죠? 그거 없으면 상무님 기분 상해하세요”
“그럼요, 팀장님이 몇 번이나 말씀주셨는데. 넉넉히 마련해 뒀습니다”
제안 내용보다 음료를 신경쓰는 모습에 호진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호진이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 중 그만큼이나 외모와 캐릭터가 다른 경우도 드물었다. 지난 주에 둘이 가졌던 저녁 자리에서 강혁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오늘 제안의 아군을 미리 만들어 놓기 위한 접대차 호진이 마련한 자리였다. 강혁 팀장에게 메뉴를 고르라는 호진의 권유에도 인근을 두 바퀴 정도 돌 때까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호진이 눈에 보이는 횟집에 자리를 잡고 막 자리에 앉을 때였다.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그가 “수산물보단 고기가 좋은데”라고 조그맣게 혼잣말하는 걸 보고 밑반찬을 가지고 나오는 종업원에게 사과한 후 인근 고기집으로 옮겼다. 비로소 강혁의 얼굴에 만족감이 올라왔고, 덩치답게 많이 먹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이다 네 병을 비워가며.

호진이 PT를 마쳤다. 여러차례 리허설을 거친 뒤라 발표는 매끈하게 진행됐고 질문과 토론 세션이 시작됐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광고주의 첫 질문과 코멘트에서 반응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컴택 오 상무가 입을 열려는 찰나에 호진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음 잘 들었어요. 준비 많이 하셨네요”
표정과 말투에 묻어나오는 느낌은 좋았다. 호진이 그의 종이컵을 보니 매실 음료도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그래, 강 팀장 생각은 어때?”
“네…? 그게…”
오 상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에 앞서 강혁 팀장을 향한 질문으로 시작했고 순간 강혁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해지며 얼굴이 금새 빨개졌다. 호진과의 약속은 오 상무가 좋은 코멘트를 하면 강혁이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추임새를 넣기로 한 것이었다. 한우 20만원의 값어치가 날아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난 전체적으로 좋았는데 말이야. 올해의 부족한 점을 잘 짚어냈고 그걸 보완하고자 하는 방향도 잘 잡은 것 같아”
오 상무는 강 팀장에게 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답할 말을 우물쭈물 하는 사이 자신의 총평을 말했다. 말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것이 습관인 모양이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새로온 구팀장이 맥을 잘 잡은 것 같네요. 내년이 기대됩니다!”
꽃등심 값을 했다는 생각에 호진은 돈이 아깝지 않았다. 희철이 호진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천장을 향해 고개를 들고 앉아있는 건식을 제외하고는 팀원 모두 지난 몇 주간의 고생의 보람을 찾은 듯한 기쁜 표정이었다. 호진이 내년 1분기의 매체 운영 계획에 대해 설명한 후 미팅이 마쳐갈 때 즈음 이었다. 오 상무가 빈 종이컵을 매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요즘 광고회사에서는 회의할 때 담배 안 피나? 나 때는 이 종이컵에 물 조금 따라서 줄담배 피면서 아이디어 짜내고 그랬는데 말이야”
다희와 유진이 티가 날 정도로 얼굴을 찌푸렸고, 호진 오른편에 앉아있던 병환은 당장이라도 자신은 피지도 않는 담배를 꺼내 오 상무에게 건넬 듯한 기세로 엉덩이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호진은 그의 팔뚝을 살며시 눌러 자리에 앉혔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막내였을 때는 회의 시작 전에 종이컵으로 재떨이 만들어 테이블에 세팅하는게 일이었네요. 요즘은 그렇게 못하죠” 호진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래도 그때는 낭만이 있었는데 말이야. 거 있잖아?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에서 번뜩이며 떠오르는 아이디어”
오쌍진 상무는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듯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입가에 대고 연기를 내뿜는 시늉을 했다. 그가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광고대행사에서 두 달 정도 견습 사원으로 일한 경험을 자주 무용담처럼 이야기한다는 것을 희철을 통해 들었기에 호진은 그러려니 했다. 무엇이든 괜찮았다. 끝이 좋았으니.

“자 그럼 내년에도 잘 해봅시다” 오 상무의 마무리 멘트에 호진은 안도와 허탈감을 동시에 느꼈다. 어쩌면 제안 내용과 상관없이 컴택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니 뻔한 질문과 뻔한 코멘트만 이어졌다. 제안 내용에 있던 몇 가지 구멍과 염려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지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큰 부담은 내려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때였다. 오 상무가 “벌써 퇴근시간이네”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진이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사십분이었다. 지금부터는 예상되는 각본에 따른 대사가 이어질 것이었다.
“장 상무님, 저녁에 특별한 일정 있나요?”
“아이고,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오 상무님과 함께라면 취소해야죠. 어렵게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시고 가시죠”
“그래요? 다행이네. 모두 다 같이 가면 너무 많으니 전체 회식은 연말에 한 번 잡는걸로 하고, 오늘은 상무님하고 조촐하게 이야기할 것도 있고 한데”
“그럼요. 바로 제가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구 팀장이 상무님 모시고 담배라도 한 대 피고 있어. 내가 바로 흡연실로 갈게”

두 임원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까지 확인한 후 였다. 남아 있는 기획 2팀원들과 호진을 바라보는 강혁 팀장의 눈빛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강렬함이 전해왔다.
“자 그럼, 수고한 우리도 간단하게 뒷풀이 할까요?”
호진이 팀 접대비가 얼마 남았을지 머리 속으로 계산하며 꺼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희가 답했다.
“전 오늘 필라테스 예약이 있어서요”
“저도 선약이 있습니다” 이어진 건식의 말에 됐네 이사람아. 너는 안오는게 돕는거야라고 호진은 생각했다.
나머지 팀원들은 따라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일부만 참석하기도 모양새가 애매했다. 호진은 강혁 팀장의 팔짱을 가볍게 끼고 “그럼 오늘은 우리도 둘이서만 오붓하게 내년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하시죠”라고 말하며 엘리베이터의 하행 버튼을 눌렀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호진은 경근과 눈웃음을 교환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종일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오늘 같은 날은 파전에 막걸리가 좋을 것 같은데요. 바로 근처에 괜찮은 데가 있습니다. 가시죠”
오늘도 꽃등심을 계산할 예산은 없었다. 강혁의 떨떠름한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하며 호진은 먼저 잰걸음으로 퇴근 길의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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