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30분 정도 늦겠다 미안’
판교 역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호진의 휴대폰 화면에 장호황이 보낸 메신저가 떴다. 시계를 보니 저녁 여섯 시 십분 전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건 매번 있는 일이기에 호진은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광고주 외근을 일찍 마치고 약속 시간보다 먼저 온 것은 자신이었다. 그 동안 뭐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메시지 알림이 또 울렸다. ‘내리면 바로 백화점이니 거기서 놀고 있어’ 말 그대로 지하철 역 출구가 바로 백화점으로 이어져 있었다. 여느 백화점보다 훨씬 더 화려한 출입문 앞에 선 호진은 오픈할 당시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기사가 기억났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수와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평일 저녁이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호진은 백화점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하 식품관은 마치 대형 마트처럼 붐비고 있었다.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그에게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판교 맘’이라는 말이 유행하는 동네 다웠다. 신흥 부촌에 새로 지은 백화점답게 내부는 널찍하고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웠다. 호진을 스쳐 지나는 사람들에게서 풍요로운 생활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갖가지 해외 메뉴로 특화된 식당의 젊은 커플들은 대충 걸쳐 입고 나온 옷차림이면서도 어딘가 세련되어 보였고 식료품을 고르는 사람들은 판교 벨리의 IT 기업에서 퇴근 길에 들린 듯 했다. 인근에 입주해 있는 스타트업 대표주자인 ‘네카라쿠배당토’라고 불리우는 기업들의 연봉이 최근 가파르게 오른다는 이야기가 호진은 생각났다. 그래서 장도 백화점에서 보는구나. 예전 같았으면 자신의 모습과 비교하며 속 쓰려한 그였지만 이제는 이런 삶도 있구나라고, 물론 희미한 질투심은 남아있지만, 생각하게 되었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은 호진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보다 낫고 못하다는 비교와 줄 세우기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상처 받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다름으로 인정하고 나니 부러울지언정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지 않았다. 그게 세상에 익숙해 지는 길일 것이라 호진은 생각했다. 그렇게 몸매처럼 둥글둥글해지는 중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명품 쇼핑의 훈장인 양 쇼핑백을 두 팔 가득 들고 다니는 중년 여인과 와인 샵에서 점원 곁에서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며 와인 병을 유심히 바라보는 노신사의 모습도 호진의 시선에 들어왔다.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가장 많은 부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있는 젊은 엄마들이었다. 유모차가 없었으면 아이 엄마라고 생각하지 못할 외모들을 뽐내고 있었다. 호진이 몇 번이나 힐끗 쳐다본 여자들은 유모차를 끌고 마치 패션쇼 런웨이라고 해도 믿을 포스를 내뿜고 있었다. 레드 카펫과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없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호진은 퇴근 길 직장인의 모습을 한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 같았다. 그래서 였을까. 할인 스티커가 붙은 조리식품이 있으면 몇 개 사갈까 했던 생각은 눈앞의 풍경에 압도되어 염두가 나지 않았다. 장호황과 만난 후 집에 가면 열 시가 훌쩍 지나 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고,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온 음식은 제 아무리 백화점에서 산 것이라 하더라도 맛이 떨어질거라 호진은 포기했다. 마치 포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나는 여우처럼 호진은 호황의 연락을 기다리며 식품관을 몇 바퀴 째 돌며 사람 구경을 계속했다.
일곱시 십분에 백화점 앞 도로에 호황의 차가 도착했다. 근처 공유 오피스에 입주한 지 이주일이 지난 그의 사무실을 처음 방문하는 날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호진이 감탄하며 말했다.
“야 판교 벨리라더니 진짜네. 여긴 완전히 다른 세상이네”
“경기도 촌구석이라고 생각하고 왔나 보네. 나도 와보고 놀랐어. 그런데 이젠 화려한 동네는 작별이야. 좀 구석으로 들어가야 된다”
호황의 차에서 창 밖을 보니 기사에 다뤄지는 기업의 이름들이 높은 건물들 벽면에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 장사장님 회사도 저래야 되는데. 이제 판교 입성했으니 절반은 왔네. 시작이 반이라고 하잖아”
호진의 농담에 호황은 싫지 않은 듯 잘 되야지라고 답했다. 십 분 정도 운전해 가서 밝은 네온사인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접어 들었다. 여기야. 커다란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 가며 경기도에서 심사를 거친 스타트업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공유 오피스라고 호황이 말했다. 역삼역 인근에서 오랜 기간 사무실을 임대해 쓰던 그는 좋은 기회로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호진이 영화 마케팅 사업을 할 때 알게 된 장호황은 동갑내기였고, 몇 번 만나지 않아 서로 죽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슷한 또래 창업가들의 친목 모임에서 첫 인사를 주고 받았을 때 호황이 어떤 사업을 하는지 호진은 정확하게는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해외에서 상품을 들여오는 것부터 마케팅 컨설팅 등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는 만날 때마다 진행하는 일이 바뀌어 있었는데, 호진은 여러가지 사업을 지치지 않고 돌리는 호황을 ‘연쇄창업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술도 자주 마셨지만 가끔은 둘이 함께 호황의 프로젝트 제안서를 만들었다. 마케팅 컨셉을 만들고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제안해서 일을 따오는 일은 둘이 함께 작업하면 빠르게 진행되었고 제안서의 퀄리티도 높았기 때문이다. 호진은 보수를 받지는 않았다. 호황에게서 프로젝트 배경 설명을 들으면서 간접적으로 그 쪽 상황을 배우게 되어 좋았고, 무엇보다 호황과 함께하는 작업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상장하면 우리 사주 나눠달라는 농담과 호황이 사는 술 한잔으로 족했다. 최근에는 경단녀의 교육과 창업을 지원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구청에 제안하려 준비 중이었는데 호황이 만들고 있는 어플에서 구현이 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이 건을 따게 되면 어플 오픈과 함께 고정적인 수입이 보장되기에 평소보다 더 신경쓰고 있었다. 이미 두어 차례 이 일에 대해 아이디어를 고민했던 둘이었고 오늘 세번 째 만남에서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다. 제안서의 플롯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때, 이 정도면 뼈대는 잡힌 것 같은데?”
“우리 구 프로가 도와주니 확실하네. 그래 내용은 이렇게 하고 디자인 구성하고 다듬는 건 외주 디자이너한테 맡기면 되겠어. 고맙다”
“좋네. 나중에 완성본 나오면 최종 점검만 마지막으로 하자. 제안이 언제라고 그랬지?”
“이 주 뒤야. 제안서 완성은 일주일이면 될거고. 덕분에 이제 한시름 놨다”
“배고프다. 아직 시간 이르네. 어디가서 반주에 밥이나 먹자. 시간 괜찮아?”
“그러자. 우리 구 선생한테 약소하지만 밥은 먹여서 보내야지. 이 앞에 동태찌개 잘 하는데 있어”
회의실에서 이야기할 때는 몰랐는데 호황이 노트북을 놓으려 사무실 공간으로 들어가자 곳곳에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 창업자들이구나. 호진은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며 생각했다.
호황이 말한 식당은 횡단보도를 건너 바로 앞에 있었다. 들어가니 아직 아홉시 전이었고 호진의 집으로 가는 지하철 막차까지 두 시간은 넉넉히 남아 있었다. 식사 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은 한 테이블을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는데 대학생처럼 보이는 자유로운 복장의 남녀 셋이 앉아 있는 테이블엔 소주가 네 병 정도 놓여 있었다. 호황이 TV라도 보면서 먹자고 그들 테이블에서 하나 건너에 자리를 잡았다. 잠깐만. 광고주에게 온 메신저에 호진이 답장을 하는 사이 호황은 앞에 놓인 어묵 볶음과 콩나물 무침 등 반찬에 젓가락을 가져가고 있었다.
“오늘 IR 피칭어땠어요?”
스냅백에 엘이이 다저스 점퍼를 입은 남자가 앞 자리에 앉은 여자에게 물었다.
“뭐 하고싶은 말 다하고 왔어요. 어차피 돈 많은 놈들 지랄하는 자린데요 뭐”
과격한 말에 호황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대답의 주인공을 봤다. 노란 색 나이키 로고가 박힌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그녀는 앳되 보였고 말 때문인지 인상이 세어 보였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창업을 했구나’
흰머리가 희끗한 자신의 모습과 대조된다는 생각에 호황은 스마트폰에 집중한 호진을 놔두고 자기 앞의 소주잔을 채워 입에 털어넣었다. 명문대 나와 대기업에 입사한 그였지만 채 오 년이 되기 전에 챗바퀴 같은 생활에 싫증이 났다. 일년 준비 후 미국으로 MBA를 다녀왔고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숫자를 만지는 투자사도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실리콘 벨리에서 인턴십 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고, 기존의 인맥과 새로 알게된 사람들의 네트워크로 여러 종류의 사업을 진행해 왔다. 다행히 크게 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이 알아줄 정도의 성공을 하지도 못했다. 큰 성공에는 투자가 필요했다. 요즘 투자는 테크가 없이는 어려웠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 일 년 전이었다.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으로 모바일 플랫폼 사업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고 준비해왔다. 곧 런칭을 앞두고 테크 스타트업들이 모여있는 판교로 사무실을 옮긴 것은 비용 절감도 있었지만 창업자들과의 네트워크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것은 많은 창업자들이 많게는 호황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리다는 것이었다. 입주한 공유 사무실에서 사십대는 자신 뿐이었다.
“무슨 경우 없는 주님이시냐? 저녁에도 연락을 하고 그래. 매너없이”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호진에게 술을 따르며 호황이 말했다.
“내일 광고 세팅한 것 때문에 알려줄게 있어서 그런거야. 뭐 큰건 아니야. 다시 한 번 확인하는거지” 소주 잔을 비우며 호진이 말을 이었다.
“요즘 디지털 광고는 세세한 것까지 타겟 세팅이 가능하잖아. 자주 바꿀 수도 있고. 예전에 광고 하던 때랑 달라. 만지면 만질수록 좋아지는거지”
“참 그쪽 POC 결과는 어때요? 크게 프로덕트 만져야 되는거 아니예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부동산 서비스라는게 워낙 기존 경쟁자가 많아서. 일단 베타 테스트 가입자는 생각보다 많은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너 이번에 종부세 좀 나왔겠다. 작년보다 많이 올랐지?”
“기사에서 워낙 겁을 줘서 걱정했는데, 뭐 그만큼은 아니야. 가진게 이거 하난데. 걱정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휴학은 연장하겠네요? 이번 IR에서 투자금 들어오면 본격적으로 달리는거 아니예요?”
“다행히 창업자는 휴학 연장이 되더라구요. 이제 휴학 삼학기째라 걱정했는데. 뭐 이거 터지면 학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실리콘벨리에서는 다들 중퇴자 투성이라던데요”
“너네 딸은 이제 공부 좀 해? 우리 아들은 아무리봐도 공부는 아닌 것 같다. 요즘은 그냥 애가 밝기만 해도 다행이다 싶어. 흐흐”
“아빠는 창업해서 스타트업하는데, 자기는 그런거 안할거래. 그냥 안정적이고 길게 일하는게 좋다고 하더라고. 이제 중학생밖에 안됐는데. 꿈을 크게 가지면 좋을텐에 말이야”
여기요. 두 테이블에서 식당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겹쳤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나즈막한 TV 소리 외에는 두 테이블에서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식당 안은 조용했다.
“그나저나 넌 참 대단하다. 난 이제 사업하라고 해도 못하겠어. 한 번 말아먹고 나니 용기가 안나”
“테크로 승부거는 이 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야지. 좀 많이 도와주라. 초반에 버틸 자금처만 있으면 분명히 승산있어”
“지금하는 피보팅은 어떻게 될꺼 같아요? 카카오 출신 개발자랑 같이 한다면서요?”
“기술은 좋은데 아직 사업 모델이 없어요. 그것만 만들면 그 사람 인맥이 많아서 투자 꽤 될거 같은데”
“여튼 너 첫 회사로 돌아간거니까 꽉 붙들고 존버해야 돼. 다시 나와봐라. 추워. 다시 받아준 회사에 충성을 다해라”
“충성이 아니라 생존이지. 그런데 이제 어린애들은 그런 것도 없어. 열정 좀 보여봐라 얘기하면 팀자 쳐다보는 눈빛이 아주”
“자 이제 술도 좀 마셨겠다 다시 들어가 볼까요? 원래 음주 코딩이 또 잘 되거든”
“난 빈 회의실에서 눈 좀 붙였다가 새벽에 할려구요. 들어갈 때 카페인 음료 싼 걸로 몇 개 내가 살게요”
“그래요 오늘 피칭 성공했다고 치고 은주 씨가 쏴요”
젊은 일행이 떠나고 테이블이 비자 식당은 더 고즈넉해졌다. 호진과 호황의 대화도 갑자기 뚝 끊겼다. 각자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 일어나자. 각 일 병이면 딱 좋게 마셨네, 잘 먹었다”
“그러자. 이제 예전처럼 밤 새서 일도 못하고 술도 못 마시겠어”
옷을 걸쳐 입고 나온 호진과 호황은 가게 앞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 건너 스타트업 센터에 환하게 켜진 유리창을 바라봤다. 몇몇 사람들의 실루엣이 창가에 비치곤 했다. 호진은 백화점 지하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느긋한 백화점에서의 저녁 식사를 즐기는 그들도 과거의 언젠가는 미래를 꿈꾸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을까. 나와 친구는 무엇을 투자하고 살아왔을까. 호진은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시계를 봤다. 막차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택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서 우린 엑스인 거야 (상) (0) | 2022.01.01 |
---|---|
행복한 사람은 늘 관대하다 (0) | 2021.12.25 |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게다가 그가 갑이라면 더더욱 (0) | 2021.12.18 |
쓸 뿐이다,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0) | 2021.10.10 |
양조위와 함께 늙어가는 것에 대하여 (0) | 2021.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