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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된 번호였다. 열흘 정도 후에 연락드리겠다고 했었지. 당시는 빈소 마련이며 어디까지 연락해야 할지 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마지막까지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가 할 일인 걸요. 평온하게 가신 것도 다 어머님 복이셨죠”
어머니가 있던 방 정리가 끝났고, 물품 중 챙길 것을 고르러 한 번 다녀오라는 전화였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논이 양옆으로 늘어선 좁은 길을 지나는 한 시간 정도 거리.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성심 요양원이 있다.

삼일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조문객은 드문드문했다. 어머니 쪽은 연락할 친척이 없었고, 친가도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왕래가 뜸한 지 오래였다. 그러게 반대하는 결혼은 왜 했대. 이렇게 갈 것을. 아버지 빈소에서 처음 보는 노인들이 늘어선 소주 병을 가운데 두고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쟁반을 들고 오가느라 분주했다. 성당에서 온 당신 지인들 외에는 누구와도 길게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색한 짧은 목례가 다였다. 추석이나 설날에 친척 집을 방문한 기억은 없다. 기억 속의 명절 풍경은 한적한 도심이다. 문 닫은 음식점과 휑한 차도. 그래도 명절인데. 어머니는 시장에서 조금 떼어온 송편이며 떡국을 세 가족 밥상에 올렸다. 우리 아들 결혼하면 며느리가 명절 스트레스는 없겠구나. 어머니의 미소는 쓸쓸해 보였다.

“정 작가. 이런 자리에서나 보네. 요즘도 계속 쓰고 있어?”
몇 안 되는 조문객의 절반은 내 쪽이었다. 어머니의 부고를 알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치기도 뭐해 가까운 몇 명에게만 알렸다. 하지만 영화판이란 게 좋은 쪽이든 아닌 쪽이든 소식은 빠르게 퍼진다. 네 다섯 명 정도 모여 앉은 테이블에 잠깐이라도 앉아야 했다. 
“사무실에 좀 들러. 같이 얼굴도 보고 술도 한잔해야 스토리가 나오지. 예전처럼”
“조금씩 쓰고는 있는데. 아직 초고도 안 끝나서요. 완성되면 가지고 갈게요”
제작 건이 세 번 엎어질 때까진 형, 동생 하며 지내던 제작사 대표는 자리에 앉을 때 벌써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작가를 동시에 돌리고 있다는 걸 알고 나선 정이 떨어져 버린 사람이다. 실은 시나리오에 손대지 않은 지 일 년이 넘었다.
“제수씨는 어딨고? 아들내미도 많이 컸겠네. 그때는 조그마한 게 귀여웠는데”
“지영 씨 미국 본사 발령 났어요. 애하고 같이 넘어간지 꽤 됐어요. 그치 정 작가?”
“역시 능력자야. 앞으로 제수씨한테 잘 보여야겠는데? 영화계 큰 손이잖아, 거기”
근황에 대해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뻔히 알고 있을까. 나 때문이 아니라 전처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아들의 이혼을 모르는 상태로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박제된 기억 속에 그 사실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너만 잘 살면 된다. 요즘 매일 너희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어쩌면 이미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주말에 아내와 아들 없이 혼자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일이 계속되었을 때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 않았지만 돌아가려 채비하는 나를 보며 글썽이는 눈으로 어머니는 내 손을 잡았다. 언젠가는 말씀 드려야지. 아내와 아들이 미국으로 떠난 뒤 주저앉을 어머니의 표정을 두려워하며 몇 달을 보냈다. 그 사이 그녀는 자신만의 세상으로 숨어 들어가 버렸다. 

순하고 조용한 여자. 아내를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이었다. 진행하던 제작 건이 막바지에 무산되고 얼마 후, 지방 도시의 영화제 프로그래머 의뢰가 왔다. 아직 ‘천재 작가’ 소리를 들을 때였다. 5개월짜리 프로젝트로 현지 거주 제공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머리라도 식힐 겸 장기 여행 삼아 다녀오자는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재미있었고, 나름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아시아 신예 감독들의 작품은 신선했고 주변 대학 영화학과 학생들과의 술 한잔 대화는 위로가 되어줬다. 

“그래도 나루세라고 생각하는데. 오즈가 형식미에서는 압도하지만, 그래서 인간 내면을 풀어가는 서사로는 나루세를 따라갈 수 없지”
“정 작가는 늘 이렇다니까. 무조건 약자를 사랑해”
“그야 내가 늘 지는 쪽이었으니 당연한 거지. 하하”
영화제 개막을 일주일 앞둔 회식이었다. 몇 가지 챙길 것을 제외하고 큰 준비는 마친 상황이었다. 한숨 돌렸다는 홀가분함과 꽤 괜찮은 프로그램으로 꾸렸다는 자부심에 모두가 들떠있었다. 술잔을 들고 자리를 옮겨 다니던 중에 번역 담당자 맞은편에 앉게 됐다.

“지영 씨죠, 이름이? 회의 때마다 뵀는데,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요”
“네”
머쓱할 정도로 짧은 답이었다. 보아하니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은 듯했다. 주변에 앉은 사람 중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난처했다. 회의 때도 거의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참. 그 부분 참 좋았어요. 특히 지영씨가 번역한 자막이. 왜 싱가포르 감독 작품이었는데”
“내 곁에 있어줘, 말씀인가요”
“네 맞아요. 에릭 쿠 감독 작품”
“그런데 거기서 뭐가요”
“영어는 잘 모르지만. 마지막 신의 독백이 참 아름답더군요. 그 뉘앙스가, 뭐랄까 시적이었어요”
지영은 살며시 웃었다. 일에 대한 자부심이었을까. 실제로 영화의 그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몇 번 끊어지긴 했지만 꽤 즐겁게 이어졌다. 그녀는 영어를 잘했고 영화도 좋아했다. 동시통역사보다는 영화 번역 쪽을 택한 이유라고 했다.
“작가님 영화 좋았어요. 차기작은 어떤 내용인지 조금만이라도 말해 주실 수 있어요?”

데뷔작으로 각본상을 탄 천재 작가. 한때 그렇게 불렸다. 원래 꿈은 소설가였다. 몇 번의 신인작가 공모전에서 떨어지고 용돈이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에 써 본 시나리오가 덜컥 당선됐다. 야심 가득 찬 재능 있는 신인 감독과 만나 어쩌다 보니 제작으로 이어졌고,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가 됐다. 나는 얼떨결에 업계가 주목하는 신인 작가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게 정말 낮은 확률의 신데렐라 스토리였음을 알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후의 시나리오는 제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투자로 결정되지 못한 시나리오 작가에게 보수는 없었다. 가끔 제작사에서 취재비로 사용하라고 주는 돈은 급여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신예로 인정받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조금씩 내 존재감은 흐려지고 있었다.

아내와 영화제 이후에도 만남을 이어갔다. 그녀는 나라는 사람보다 영화 쪽 관계자를 만난다는 기분으로 관계를 시작했다. 결혼 날을 잡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서로 정 작가님, 지영 씨라고 불렀다. 감독이나 제작사, 투자사 관계자들과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연인으로 함께 했는데, 그녀의 경력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 기뻤다. 영화계의 인맥이 넓어짐에 따라 그녀의 활동 영역도 함께 커졌다. 운율이라고 할까. 지영 씨가 번역한 문장은 시적인 매력이 있어요. 나의 칭찬에 아내는 늘 환하게 웃었다.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 번역가. 일과 생활이 잘 어울어진 좋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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