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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기류 안내 방송에 눈이 떠졌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깊게 잠들지 못한다. 출장을 마친 뉴욕에서 인천까지의 긴 시간, 좌석은 좁고 담배도 피울 수 없다. 등이 꺼진 기내는 어두웠다. 세수하고 영화나 봐야겠다. 마침 통로 쪽 좌석이 비어 있길래 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치잇, 하는 소리와 함께 세면대 수전 사이로 물총에서 쏘는 것 같은 물줄기가 솟았다. 변기 물을 내리던 나는 당황했다. 내가 뭘 잘 못했나. 아직 세면대에 손도 대지 않았는데. 경고음이라도 울리는 것 아닌가, 걱정하고 있을 때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잠결에 문을 잠그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사람이 안에 있음을 알아챈 백인 사내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물난리 중인 상황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양새였다.  

 

나는 모른 척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승무원에게 말해서 조치하게 하면 되겠지. 내 좌석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무언가 달라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주변이 밝았다. 그새 등을 킨 것인가. 아니다. 무엇보다 소리가 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조용하게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 있었다. 객실로 통하는 자동문에 ‘유로 스타’라는 로고가 보였다.  

 

앞 쪽 좌석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내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향해 아내가 웃으며 눈을 흘겼다. 아빠 똥쟁이. 아들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듯이 놀렸다. 너무 어렸다. 이미 엄마만큼 키가 큰 녀석인데. 아들은 펼쳐진 간이 테이블에서 파워레인저 다이노포스 피규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예전에 싱가포르로 셋이 여행 갔을 때 녀석이 손에서 놓지 않던 장난감이다. 그때 알았다. 이건 꿈이구나.

 

“또 내 말 안 듣고 있지. 죽을래?”

집이다. 셋이 거실 바닥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었다. 빨래를 개고 있는 아내 옆에 아들은 유아용 커다란 레고 블록으로 공룡을 만들고 있다. 아내는 개어진 빨래를 들고 일어났다. 수건은 화장실로, 옷은 각자의 옷장으로 옮기겠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세탁된 옷가지를 아내처럼 깔끔하게 접을 수 없었다. 

 

아빠, 아. 아들이 입을 벌리며 내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과자가 있었다. 새끼손가락 크기의 과자에 누텔라 초코 잼을 찍어 먹는 작은 플라스틱 용기였다. 유치원 때까지는 편의점에 들릴 때면 하나씩 집곤 했다. 듬뿍 찍어 입에 넣어준 과자를 아들은 앙, 하고 한 입에 물었다. 내 손가락에 묻어있는 초코 잼에 아들이 입술을 대고 빨았다. 조그만 혀가 간지러웠다.

 

아내가 책 몇 권을 들고 돌아왔을 때 난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새로 주문한 책이야. 애들이 되게 좋아한대”

아내는 밝게 웃고 있었다. 자신의 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 여전히 아름다웠다. 내가 처음 보고 마음을 뺏겼던 그 미소였다. 

 

나는 알고 있다. 아들이 이 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몇 번이고 봐서 제본한 부분이 뜯어져 종이가 떨어질 정도였다는 걸. 스카치테이프로 한 장씩 붙이느라 힘들었다는걸. 나는 알고 있었다. 말을 하면 이 시간은 끝난다는걸.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앞으로 내가 할 일에 대해 너무 미안해”

“뭐가 미안해? 뭣 땜에 미안한지는 알고 있어?”

“그 여자 때문에 생길 일이 가장 미안해. 그리고 당신하고 우리 아가한테 줄 상처도, 내가 할 모든 나쁜 일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내의 표정이 흐릿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난 2022년에서 잠깐 왔어. 우리 가족 잃고 싶지 않아. 내가 잘할게”

 

눈이 떠졌다. 무슨 이상한 꿈이라도 꿨어. 누군가 옆에서 어깨에 손을 올려줄 것만 같았다. 침대 옆은 비어 있었다. 다시 잠들 수도,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축축한 베개에 오른뺨을 대고 다시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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