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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어제 저녁에 네 생각이 났어. 정확히는 네 냄새가 바람에 실려 있었어.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여름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였어. 이맘때의 바람은 가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해. 이번은 너였지. 너의 등에 딱 붙은 채 네 허리를 꼭 안고 달리던 때 맡았던 냄새. 그리고 네 파란 바이크.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을 때였지. 무엇이든 하려면 다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그게 그렇게 되니. 시간은 손에서 흘러내릴 듯 많으리라 생각할 때였잖아. 매미 소리에 눈이 떠지면 그저 천장만 바라보며 한동안 누워있던 여름 방학이었어. 스마트폰 같은 건 없었으니 왜 이걸 보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손가락을 놀릴 일도 없었고. 오늘은 무얼 할까, 누굴 만날까,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창밖에서 귀여운 소리가 났지. 작은 공룡이 우는 것 같이 앙증맞게 그르렁 거리는 소리에 밖을 보니 네가 손을 흔들고 있더라.

 

교실에서 공부만 하던 범생이었던 네게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야, 타”라고 수줍은 듯 외치던 널 보고 웃느라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어. “나 지금 츄리닝인데”라는 내 말에도 넌 막무가내였지. 그냥 한 바퀴 돌아보자는 네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네 뒤에 앉아버렸어.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구한 그 바이크를 너는 ‘파란 차’라 부른다고 했지. 스쿠터가 무슨 차냐는 내 핀잔에도 넌 그저 웃기만 했어.

 

이걸 산 이유는 백 가지도 넘지만 넌 그중 몇 개만 이야기해주겠다고 했어.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어서. 무작정 생각날 때 바다를 가보고 싶어서. 그리고 지금 이렇게 해보는 거였다고 했지.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 그 말을 하는 네 가슴이 뛰고 있음을 네 등에 뺨을 대고 있던 난 알 수 있었어.

 

여름 바람은 가끔 이렇게 날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애써 지운 기억이 바람에 섞여 내 온몸에 부딪혀 오면 피할 길이 없어. 너의 파란 차를 타고 넌 어디까지 다녀 봤을까. 네가 하고 싶었던 백 가지 바람은 다 이루고 살고 있니. 이제부터 난 바뀔 거라고 말하던 네가 참 멋졌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예쁘지 않냐고 네가 물어봤던 그 파란 바이크보다 몇 배는 더 근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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