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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가 되자 고객들로 붐비던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 여유가 생겼다. 매장 구석에 위치한 서비스 테이블 위에 놓인 여러 개의 빈 커피잔을 치우는 중인 직원 두 명이 잡답을 나누고 있었다.
“왠지 요즘 손님 늘어난 것 같지 않냐?”
“그러게. 남자들끼리 오는 테이블이 늘었어”
“다 이유가 있지. 왜 그런지 알아?”

그중 한 명이 턱을 위로 올리는 시늉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한유리 과장이 있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려는 듯 오늘도 풀세트 치마 정장을 빈틈없이 갖춰 입었다. 그녀가 걸어 지나갈 때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유리를 넋 놓고 보느라 잠시 손을 멈춘 직원들 곁으로 서한준이 서비스 테이블에 놓인 물병에 얼음 물을 채우러 왔다. 한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 생각했다. ‘나한테는 한나 매니저님이 훨씬 예쁘고 매력적인데’

유리는 고객의 불편한 점과 매장에 개선이 필요한 사항을 청취하고자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락을 얻은 테이블에 잠시 앉아 대화를 나누곤 했다. 지금도 그녀가 맞은편의 남자 고객과 대화하면서 가끔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지을 때면 상대방은 황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짜 예쁘긴 하다. 이러다가 민주 씨 직원 인기투표 1등 놓치겠는데”
한유리가 앉아있는 곳을 보며 빈 테이블 위에 남은 물기를 닦던 직원이 옆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민주에게 말했다. 민주는 동경하는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에이, 제가 감히 어떻게 저런 분하고… 아, 나도 저렇게 우아하고 싶다!”

유리가 오늘 고객을 인터뷰한 내용을 노트북으로 정리하고 있을 때 유영빈 점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한 과장님, 이제 오신 지도 며칠 됐으니 그런 풀세트 정장, 그만 입으면 안 될까요?”

영빈의 말에 유리는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예전에는 이렇게 입는 거 좋아했으면서. 은근히 흥분된다고”
유리는 서로 직책을 부르며 존칭하는 것을 잊은 것처럼, 연인과 대화하듯 영빈에게 말했다.

“아니! 그건, 그땐…”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있는 영빈을 보며 유리는 한참을 웃었다.
“여하튼, 매장 유니폼 입으라고까지는 안 할 테니, 좀 캐주얼하게 입으면 어때요? 다른 직원들 보기도 불편하다고요”

흐응, 유리는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콧잔등에 살짝 주름이 진 채로 몇 초간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알겠어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이 여자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걸까. 영빈은 본사에서 유리와 함께 일했을 때,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뭔가 뒤통수를 세게 맞았던 기억이 났다.
“뭔데요?”
“오늘 저녁 사주세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유리는 입술을 모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영빈이 가장 좋아하던 표정이었다.

본사 디자인팀 한유리 대리는 마케팅팀에게 ‘공공의 적 1호’였다. 디자인 원칙과 미적인 밸런스를 이유로 마케팅에서 계획한 건마다 딴지를 걸어왔다. 첫인상은 드라마에 나오는 착하고 선한, 그리고 아름다운 여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케팅이 보기에 그녀가 하는 짓은, 그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녀 캐릭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영빈 또한 ‘마케팅팀의 볼드모트’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공채 1년 선배임을 알고 있었지만, 영빈은 디자인팀과의 기싸움에서 한유리와 맞짱을 뜨는 선봉대장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둘은 회의 때마다 앙숙처럼 치고받기 일쑤였다. 그때는 둘이 연인 사이가 될 거라 그 누구도, 당사자들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그날 미팅도 한껏 치열한 분위기였다.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났던 이전의 회의와 달리, 이번에는 유영빈이 치밀하게 준비한 논리로 일찌감치 기세가 기울었다. 이날은 마케팅이 디자인팀을 거의 압살하다시피 한 결과로 마무리됐다.

참석자들이 회의실에서 모두 나간 후 ‘이겼다’는 흡족한 기분으로 영빈이 빔프로젝터와 노트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한유리가 테이블 맞은편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자고 있나. 아까는 그렇게 사납게 떠들어 대더니’ 영빈이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자리에 펼쳐진 다이어리 위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분함이 가시지 않았는지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게 디자인 완성도 높이고 싶으면, 회사 나가서 당신 돈으로 예술을 하세요. 거 똥고집 되게 세네요, 진짜” 영빈이 내질렀던 이 말 이후, 유리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빈은 입을 꾹 다문 채 자기를 노려보던 그녀의 눈빛이 기억났다.

‘아까 내가 너무했나’ 영빈이 사과하려는 마음으로 유리 옆에 섰을 때였다. 다이어리 메모장을 절반 정도 차지하는 큰 크기로, 몇 번이고 겹쳐 굵게 쓰여있어, 안 보려 해도 안 볼 수 없는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 유영빈 개새끼

처음 생각한 것은 글씨체가 동글동글하고 귀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 새. 끼. 세 글자의 색이 모두 달랐다. 다이어리 옆에 놓인 다섯 가지 색을 골라 쓸 수 있는 멀티컬러 볼펜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디자이너는 디자이너구나. 낙서를 해도 참 컬러풀하게 하네.

풉, 영빈은 뒤이어 터진 웃음을 참지 못했다. 큭큭 대며 웃고 있는 그를 이제야 눈치챈 유리는 다이어리를 황급히 덮었다. 정말 짜증 나는 남자다. 분명 자기보다 후배로 알고 있는데, 예의는커녕 싸가지가 이렇게까지 없을까.
“뭐예요? 일 끝났으면 이제 좀 꺼지시죠?”
“아. 미안해요. 한 대리님, 저녁에 시간 돼요? 밥 살게요”

영빈은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본인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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