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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전, 휴무 계획을 등록하러 민주가 사무실에 들어가려 할 때였다. 조금 열린 문 사이로 들린 대화에 문고리를 잡은 손을 멈췄다. 한유리 과장의 저녁 먹자는 말에 유영빈 점장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 잠깐의 침묵에서 민주는 무언가 모를 둘 사이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퇴근길에 몇 미터 앞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 대신, 그들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넌 것은 민주의 선택이었다. 어디를 향하는지 모른 채로 적당히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지하철역으로 따라 들어갔다. 별 대화 없이 각자 정면만 바라보며 객차 내 좌석에 앉은 영빈과 유리는 출입문 두 개 옆 거리에 서 있는 민주를 발견하지 못했다.
열차에서 내려 환승 게이트로 이동하는 사람들에 떠밀려 걷는 사이에 둘의 모습을 놓쳤다. 아마 저 앞 인파 어딘가에 있겠구나. 민주는 아쉬움과 함께 까닭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콩닥 거리던 가슴이 진정되자 이곳이 어디인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집하고는 꽤 멀다. 지도 앱을 키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낼 때였다.
“어? 민주 씨?”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진 곳에서 영빈과 유리가 민주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어머, 민주 씨 술 잘 마시는구나. 주량이 얼마나 돼요?”
“헤헷, 안주가 맛있어서 그런가, 오늘은 술이 다네요!”
유리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흐뭇한 미소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민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주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문어 가라아게 쪽으로 향하던 젓가락을 멈칫하며 “제가 너무 많이 먹죠? 죄송해요”라며 혀를 빼꼼히 내밀었다.
“어떡해, 민주 씨 너무 귀여워. 하아, 역시 젊은 게 좋아”
“아니에요. 전 과장님이 너무 예뻐서, 꼭 만화에서 나온 것 같아요!”
이 조합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자를 바라보는 영빈은 어안이 벙벙한 채였다. 지하철을 갈아타기 전에 와인바 예약을 하려 전화했을 때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혹시나 해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작년에 문을 닫은 듯했다. 이를 어쩐다. 다른 데로 가야 할지 궁리하느라 역내에 서 있을 때, 그들 앞으로 거짓말처럼 민주가 걸어왔다.
“민주 씨, 여기서 뭐해요?”
영빈의 놀란 표정에 민주는 어쩔 줄 모른 채 답을 못하고 땀이 밴 손가락을 바지 위에 문지르고만 있었다.
유리가 “어? 우리 매장에서 같이 일하는 분이네요. 이름이.. 아, 미안해요. 아직 다 못 외워서”라고 먼저 반가운 척을 했다.
“에.. 그게, 친구랑 만나러 가는 길인데… 방금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요”
민주는 급한 대로 거짓 핑계를 댔다.
“어머 정말? 우리도 가려고 하는 데가 문 닫아서 곤란했는데” 유리가 영빈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럼 뭐, 바람맞은 사람들끼리 같이 할까요?” 영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흐응, 가지 된장 구이 괜찮다. 미소 맛이 독특하네. 산미가 센 게, 감칠맛이 좋아”
“뭔가 전문가스럽다! 언니는 왠지, 요리도 잘할 것 같아요”
어느 틈에 유리가 민주를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민주의 이 친화력의 끝은 어디일까.
“어머 얘, 실은 잘 못해, 호호” 유리 역시 민주를 어린 동생 대하듯 편히 여기고 있었다. 영빈 자신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회사에서 영빈과 유리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인사팀 동기 정지호와는 셋이 가끔 만나기도 했지만, 둘은 주의 깊게 연인 사이임을 숨기고 다녔다. 앙숙 사이로 워낙 유명했기에 그들의 관계를 딱히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회사에서 모든 걸 쏟아낼 듯 일을 한 둘은, 퇴근 후나 주말에는 탈진한 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주로 영빈의 원룸에서 지냈기에 데이트 중에 누군가의 눈에 띨 일도 없었다.
유리가 몇 번 요리를 해준 적이 있었다.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번 먹을 맛도 아니었다. 미식가라고 모두 요리를 잘 하는 건 아니라는걸, 영빈은 그때 확실하게 알았다. 그래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며 주방에서 애쓰는 그녀를 바라보는 게 좋았다.
“요리 못해요. 맛은 잘 보지만, 어?”
그때를 돌이키다가 무심코 내뱉은 영빈의 말에 유리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째려봤고 민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본사에 쿠킹 스튜디오가 있어요. 셰프도 몇 명 있고. 민주 씨도 저번에 갔었죠?. 어, 그러니까 가끔 직원들도 거기서 실습을 해요. 한유리 과장님이랑 같은 조가 된 적이 있어서, 맞아. 몇 번 시식했거든. 그때 솔직히 별로였어요. 하하”
장황하게 말을 마친 후 영빈은 “저기 잠시만요” 하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내가 왜 민주 씨 앞에서 유리 이야기를 숨기려고 할까, 영빈은 생각했다.
셋의 자리는 마지막까지 훈훈하고 정겨웠다. 유리는 일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 까맣게 잊은 듯 보였다.
“다음에는 더 많은 직원들과 이런 자리 또 만들게요”
영빈의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때 유리가 말했다.
“여기는 제가 계산할게요. 현장 활동비로 법인 카드 예산 받은 것도 있으니까요”
“에이, 그러면 더 많이 먹을걸!” 민주가 장난스럽게 배를 통통 두드리며 웃었다.
“그럼 전 여기서 버스 타고 갈게요” 도착한 버스에 민주를 태워 보낸 후 영빈과 유리는 택시를 잡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어색한 적막을 깨려는 듯 영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직 잠실 살아?”
“방배점. 내가 가겠다고 먼저 손든 거 맞아. 오빠 있는 거 당연히 알고 있었고”
유리는 다시 한 번 영빈의 손등에 손가락을 살짝 스쳤다.
버스 창으로 가로등 불빛이 스쳐 지나고 있었다. 민주는 밖을 바라보며 한유리를 생각했다. 옆에 앉아있던 그녀에게 계속 좋은 향이 났다. 어떤 향수를 쓰고 있을까. 향수를 사 본 적이 없는 자신과 비교됐다. 반짝이는 민트색이 입혀진 유리의 손가락도 떠올렸다. 민주는 손톱이 단정하게 다듬어진 자기 손을 가만히 들어봤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가끔 별말 없이 눈을 마주치던 유영빈 점장과 한유리 과장의 모습까지 생각이 이어졌을 때, 가슴 언저리 한 쪽이 뭉클하게 아려왔다. 민주는 두 눈을 꼭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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