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옜다! 해피 밸런타인”
2월 14일 아침. 카페 토라세 방배점의 남자 직원들은 약속이라 한 듯 모두가 미니 초콜릿 봉지를 들고 다니며 손가락 크기의 초콜릿을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큭큭 대고는 있었지만 웃는 게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잠시 후 민주가 출근하고 나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자, 여기요!”라며 환한 웃음으로 민주가 나눠주는 초콜릿을 받은 직원 중 몇 명은 “역시 민주 씨는 우리 매장의 천사야”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매장이 시끌시끌하지, 어리둥절했던 유영빈 점장은 초콜릿을 주고받는 직원들의 모습을 ‘역시 청춘이 좋구나’라며 흐뭇하게 지켜봤다.
만호는 민주가 전해준 초콜릿을 손바닥에 놓고는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해야 할까. 어쨌든 좋아하는 여자가 전해준 선물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일까.
“히히. 이건 셰프 거!”라고 웃으며 줬지만 다른 직원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서로 가진 마음의 무게가 아직은 어긋나 있구나. 만호는 폴짝대며 매장을 누비고 있는 민주를 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한준은 생각이 복잡했다. 남은 시간은 한 달. 어떤 작전을 짜야 화이트 데이에 강한나 매니저를 또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위잉, 소리를 내며 고속 모터가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받았으니까. 그녀에게서 초콜릿을.
어제 퇴근 시간, 한나는 눈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한준을 데리고 놀기로 마음먹었다. 지난번에 네 녀석이 날 가지고 놀려 했던 벌이야.
“그렇게나, 나한테 초콜릿 받고 싶은 거예요?”
“뭐. 그렇죠. 제 마음은 이미 보여 드렸잖아요…”
“알았어. 따라와요”
엣. 한준은 기대조차 못한 한나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벌써 몇 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한나 쪽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밸런타인 선물한 적 없다고 했잖아요?”
한나는 한 쪽 눈을 윙크하며 한준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이 내 첫 초콜릿이네”
드디어. 얼음장 같던 강한나도 결국은 여자였던 거구나. 한준은 걸음마다 땅이 출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사귀는 건가. 매장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들어가서 골라요, 그리고 계산하고 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발걸음을 멈춘 한나가 한준에게 신용카드를 내민 채 서 있었다. 편의점 앞이었다.
한준은 금색으로 포장된 동그란 초콜릿이 담긴 하트 모양의 케이스를 손에 들고 나왔다. “비싼 것도 샀네” 한나는 영수증을 보고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아니. 매니저님. 밸런타인 선물 치고는 너무 건조한 거 아닌가…요?”
“의리 초콜릿이라고 있다면서요? 뭐, 일 잘하는 직원이니까 하나 챙겨줄까 싶어서”
한준의 얼굴이 어두운 그늘에 드리워지기 시작할 때 한나가 안녕,이라는 듯 손을 살짝 흔들며 혼자 걸어갔다.
“뭐예요. 영빈 점장님, 인망이 부족하신 건가요?”
한유리 과장이 매장 사무실로 들어와 영빈의 책상 위를 훑어보고는 애처로워 보이는 듯 말했다.
“인망이요? 나름 직원들하고 잘 지내는데, 또 무슨 딴지 걸려고 그래요?”
그렇잖아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영빈은 유리의 빈정대는 말투가 거슬렸다. 그래도 나한테 초콜릿 몇 개는 올 줄 알았는데. 어제 조리실에서 만들어 준 판매용 마카롱과 쿠키 세트 외에는 아직까지 한 개도 없었다.
“흐응, 가여워라. 나라도 하나 줘야겠네”
유리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초콜릿을 앞으로 꺼냈다. 그래도 옛 남자친구라고 챙겨주는구나. 영빈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가 서 있는 곳으로 향할 때였다. 유리는 박스를 뜯어 뚝, 하고 초콜릿 조각을 떼어내고는 자기 입 쪽으로 가져갔다.
“그냥 주면 재미없는걸? 이리 와서 가져가요. 초콜릿도. 또 다른 것도”
유리는 길게 잘린 초콜릿 조각의 한쪽을 이빨로 살짝 물고는 영빈 쪽으로 입술을 살며시 내밀었다.
민주의 가방에는 아직 선물 상자가 하나 남아 있었다. 매장 직원들에게 준 것과는 달랐다. 시중에서 파는 초콜릿 종류를 섞은 것이 아닌, 지난 며칠 동안 집에서 직접 만든 것이었다. 유영빈 점장에게 주고 싶었지만 단둘이 있을 시간이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런 때가 온다고 해도, 민주는 어떻게 영빈에게 초콜릿을 전할지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도록 초콜릿은 아직 민주 가방 안에 있었다. 민주는 선물 상자를 손에 들고 매장 앞 가로등 앞에 서서 영빈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받은 하얀 눈송이가 화이트 초콜릿 가루처럼 길 위에 소복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할 때까지 영빈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 전등이 꺼진 듯 토라세 방배점이 어두워졌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영빈 혼자가 아니었다.
“진짜, 아깐 뭐였어. 깜짝 놀랐잖아”
“어머. 좋았으면서. 당황한 얼굴 꽤 귀여웠는데. 호호”
영빈과 유리가 즐거운 듯 대화하며 가로등 옆을 지나 걸어갔다. 민주는 가로등 옆 커다란 나무 기둥 뒤로 숨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이 조금씩 일그러져 하늘 위로 부서졌다.
삑삑. 한참이 지난 후 민주는 닫힌 카페 토라세 방배점 문의 도어록 번호를 눌렀다. 민주의 손에 들려있던 선물 상자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투욱, 투욱, 계단을 오르는 민주의 맥없는 걸음 소리만 어두운 공간에 나지막하게 울렸다.
사무실 문을 열고 호진의 책상 앞에 선 민주는 선물 상자를 두 손으로 고이 내려놓았다. 쌓인 눈이 녹았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에서 똑똑 떨어지는 눈물 때문인지 상자의 포장지는 한껏 젖어 있었다.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33) (1) | 2022.10.03 |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32) (1) | 2022.10.01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30) (2) | 2022.09.29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29) (0) | 2022.09.28 |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서 (28) (0) | 2022.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