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팅 애드 임원 회의가 끝난 후 희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한보경 상무가 다가왔다. “장 상무, 차 한잔하자” “그럴까요? 바로 선배 방으로 가시죠” 비서가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갈 때까지 두 사람은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평소 실없는 농담을 툭툭 던지며 분위기를 잡아가는 보경답지 않았다. 희철보다 2년 선배인 보경은 전략가보다는 영업맨에 가까웠다. 늘 허허 웃고 다니며 주변에 적을 만들지 않는 편인 그는 임원 진급은 희철보다 늦었지만 탄탄한 광고주 라인업을 갖춘 기획 2부문장을 맡고 있었다. 둘의 스타일이 달라 딱히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그렇다고 적대하지도 않는 사이였다. “너 얘기 들었지?” 보경이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희철은 무슨 일인지 짐작..
“야. 이름값 좀 해라. 이름은 무슨 무협지 주인공 같은 놈이 그렇게 소심해서야. 쯧” “송구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컴택 마케팅팀 강혁 팀장이 오쌍진 상무 앞에서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쌍진은 방금 회의에서의 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왜 재무부문 애들이 딴지 걸어올 때 한 마디도 못해? 걔들이 어이구 그러세요, 돈 쓰고 싶은 만큼 쓰셔야죠, 하는 애들이냐? 싸워서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도 스마트폰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데 전년 대비 광고판촉비 130% 증액은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요…” “야 이 등신아! 네가 짠 예산 아니야?” 쌍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고 강혁은 그보다 머리 두 개 정도 큰 키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맞잡은 두 손을 꽉 쥐며 고개..
손병환 차장은 오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오십 번 정도 했는데, 평소보다 두 배 많았다. 컴택의 신규 스마트폰 광고 최종 시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미 두 차례 시사를 마쳤고, 대표 이사까지 컨펌이 된 광고였다. 카피 폰트 등 몇 가지 미세한 편집만 남은 상황이어서 실무들끼리만 보기로 했고, 호진은 참석하지 않았다. 팀의 최선임인 손병환 차장과 정유진 사원만 컴택을 방문했다. “이거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나?”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오쌍진 상무가 예기치 않게 회의실로 들어왔고 다시, 다시를 3번 연속하여 광고를 들여다보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상무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는 컴택 마케팅 팀장인 강혁을 대신해 병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
희철 상무가 본부장실에서 나와 호진의 책상으로 걸어왔다. 다음 주 예정인 신규 광고주 경쟁PT 준비로 계속 새벽에 퇴근한 호진은 멍한 상태로 제안서가 띄워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구 팀장님 열일 하시네” 희철이 보조 의자를 가져와 호진 옆에 앉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뭔가 아직 부족해요.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못 잡겠네” “설마 네가 다 하려고 생각하는거야? 이제 생각만큼 머리 안 굴러가는 나이야. 빠릿한 팀원들 믿고 좀 맡겨봐” 희철의 말이 맞았다. 미덥지 못해 보이던 팀원들이었으나 이번 PT 준비에서 호진이 생각하지 못한 시각에 감탄하는 일이 많았다. 만사 귀찮아 하던 건식이 무슨 바람인지 참신한 인사이트를 제안했고 기대하지 않았던 기획서의 플롯을 마련해 왔을 때 호진은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