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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름값 좀 해라. 이름은 무슨 무협지 주인공 같은 놈이 그렇게 소심해서야. 쯧”
“송구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컴택 마케팅팀 강혁 팀장이 오쌍진 상무 앞에서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쌍진은 방금 회의에서의 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듯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왜 재무부문 애들이 딴지 걸어올 때 한 마디도 못해? 걔들이 어이구 그러세요, 돈 쓰고 싶은 만큼 쓰셔야죠, 하는 애들이냐? 싸워서 가져와야 될 거 아니야!”
“그래도 스마트폰 시장이 예전 같지 않은데 전년 대비 광고판촉비 130% 증액은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요…”
“야 이 등신아! 네가 짠 예산 아니야?”
쌍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고 강혁은 그보다 머리 두 개 정도 큰 키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공손히 맞잡은 두 손을 꽉 쥐며 고개가 무릎에 닿을 듯이 고개를 더 숙였다. 방금 끝난 내년 사업 계획 회의에서 재무 부문이 내년 마케팅 예산 계획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을 해왔다. 매출 목표 대비 광고 판촉비가 너무 높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강혁은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 못했다. 대표의 ‘현실적인 예산 계획을 다시 작성해서 보고하라’는 총평은 마케팅의 패배를 의미했다. 정작 회의에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쌍진은 그 분함을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강혁에게 쏟아내는 중이었다.
“야. 꺼져”
“네 상무님. 물러가겠습니다”
강혁은 맞잡은 손을 풀지 않은 채 뒷걸음질로 임원실에서 나왔다.
마케팅팀을 맡은 지 이제 반 년, 강혁은 매일매일이 버거웠다. 김포 공장에서 품질관리 업무를 하던 강혁이 마케팅으로 발령 났을 때 그 자신은 물론 회사의 모두가 놀랐다. 관련 경험이 전혀 없는 그가, 사십 대 후반의 나이로,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스마트폰 마케팅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놀랐지?”
온라인 게시판에 인사 명령지가 뜨고 30분 정도 뒤, 오쌍진 상무가 전화로 처음 한 말이었다.
“네 상무님. 송구합니다”
강혁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두 손으로 전화기를 감싸 안으며 허리를 굽혀 빈 공간을 대상으로 인사했다.
왜 쌍진이 자신을 택했는지 궁금했으나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후 쌍진이 들릴 듯 말 듯 하게 한숨을 쉬고 입을 뗐다.
“네가 내 밑으로 오는 이유는 말이지, 음, 마케팅 애들이 좀 많이 풀어져서. 군기 좀 잡으라는 걸로 이해하면 될 거야”
강혁은 신입사원부터 인사팀에서 십 년 넘게 일해왔다. 자신의 생각을 내비치지 않고, 높은 사람들을 위한 의전에 민감한 것은 본인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해온 조직 문화 영향이 더 컸다. 윗사람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그의 심기에 거슬리지 말 것이 인사팀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 길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걸어온 그였지만 차장 진급을 앞두고 좌천되었다. 이대로 가면 인사팀장까지 올라가리라 내심 기대했던 강혁은 크게 실망했다. 삼 일 간 출근하지 않고 회사의 연락을 받지 않았던 건 나름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저항의 표시였지만, 결과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김포 공장의 품질관리팀장을 맡았지만, 강혁은 그쪽 분야의 전문성도 없었다. 불량 관리와 생산 수율 점검은 공장의 ‘고인 물’인 베테랑들이 사실상 책임지는 식으로 업무가 흘러갔다. 강혁은 비정규직 생산 인력을 관리하고 공장의 기강을 잡는 군기반장의 역할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전력을 기울인 분야는 가끔씩 방문하는 본사 임원들의 의전 업무였다. 공장 현황 브리핑 자료를 매주 업데이트하고, VIP의 방문 시에는 공장장과 함께 그들의 왼쪽 뒤편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근처 맛집 예약에서부터 2차, 3차 자리의 동선 준비도 그의 몫이었고 끝까지 자리에 남아 흥을 돋우는 데 앞장섰다. 노력의 결실로 일 년 누락 후 진급에 성공했고 남은 바램은 본사로의 복귀였다. 하지만 마케팅이라니, 생각하지 못한 경우였다.
“내일부터 본사로 출근하고.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하겠지만, 전임 최 팀장은 곧 징계면직 처리될 거야. 몰래 뒷주머니를 차고 있었더라고”
전화기 너머 쌍진의 말에서 강혁은 최 팀장의 인사 카드를 기억해 봤다. 아마 중고등학교를 외국에서 나왔고 집도 강남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개인 비리를 저지르다니 의외라는 생각과 함께 쌍진이 자신을 어떻게 쓰려는지 이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관리 잘하라는 의미로 너 데려온 거다. 인사 출신이라 그런 건 할 줄 알지? 일하는 거야 내가 챙길 테니까 틈틈이 배우고”
“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강혁은 쌍진이 통화를 종료할 때까지 벽을 향해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금 상무님께 엄청나게 혼났어”
마케팅 팀원이 모여 대기하고 있던 회의실에 강혁이 들어오며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사업 계획 회의에 참석했던 송 과장이 이미 분위기를 얘기해 줬고 쌍진의 분풀이가 도미노처럼 내려오는 결과로 팀장의 드잡이를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안 혼나려고 회사 다니나’
교진은 속으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팀장이 입에 달고 사는 ‘혼난다’라는 말이 처음에는 우스웠는데 지금은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무슨 유치원생도 아니고 ‘혼난다’라는 말은 대학교 이후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교진은 가끔 전임 최 팀장이 생각났다. 유창한 영어 실력에 마케팅에 대한 전문 지식에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동생의 이름으로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광고 수수료를 중간에 착복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교진은 원래 마케팅에는 관심이 없었다. 컴택에 신입사원으로 지원한 부서는 경영전략이었다. 대학 졸업 전 2년 동안 회계사 준비를 했으나 건성이었기에 시험 준비를 그만두는 데 미련은 없었으나 기왕이면 숫자를 만지는 부서에서 일하고 싶었다. 마케팅팀에서도 효과 분석 및 예산 계획 등 숫자와 관련된 일을 도맡기 시작했고 조금은 회사 생활에 만족하기 시작할 때 팀장이 바뀐 것이다. 교진은 강혁이 마케팅팀으로 첫 출근한 날부터 속으로 그를 ‘극혐’했다.
어두운 얼굴로 팀원들을 탓하는 강혁을 보며 며칠 전 예산 수립 회의를 떠올리니 교진은 속이 더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내년 스마트폰 매출 목표는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올해 출하량과 거의 비슷한데요. 마케팅 비용도 맞춰야 되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야. 모바일 사업 매출 목표는 30% 신장인데”
강혁이 뭘 보고 있는지 스마트폰에서 눈도 떼지 않고 답했다. 교진은 빔에 띄워진 엑셀 파일에서 마우스 화살표를 아래 행으로 옮기며 설명했다.
“개인 스마트폰 매출이 아니라 통신 장비 성장에 따른 B2B 매출 신장이예요. 마케팅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올해만큼만 쓰자는 거야?”
“네. 제 생각에는 삭감되지 않아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요”
강혁이 귀찮다는 듯이 하품을 하고 답했다.
“그러면 상무님한테 혼나. 안돼. 무조건 올해보다 30% 정도는 높게 올려”
그리고 내가 알아서 재무하고 잘 정리할게, 라고 호언장담했던 강혁이었다. 결과는 교진이 예상한 대로였는데 지금 눈앞에서 ‘너희들의 잘못으로 내가 혼났다’는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팀장을 보니 교진은 등에서 벌레 몇 마리가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이고, 우리 강혁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호진은 휴대폰 벨이 울리자마자 반갑게 인사했다. 컴택의 내년 사업계획 회의가 오늘 예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반가운 소식 전해 주시는 거면 좋겠는데요”
“그게… 뭐.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보네요. 마침 시간 비워놓고 있었습니다. 하하”
강혁의 축 늘어진 목소리에서 낌새가 안 좋다는 것을 호진은 알 수 있었다. 광고주 경험을 해봤던 그는 시장 상황에 따라 광고비는 늘고 줄기 마련이고, 지금 스마트폰 시장에서는 당연히 비용 절감을 선택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요 구 팀장한테 신세 한탄 좀 해야겠다. 퇴근 시간 맞춰 이쪽으로 와 주세요”
“네 제가 맛있는 것 사겠습니다. 우리 강 팀장님 오늘 기분 전환 시켜드릴 테니 기대하세요. 하하”
쾌활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호진의 머릿속에는 컴택에서 빠지는 목표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자 그 소리에 놀란 병환이 자리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호진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고 강혁은 호진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컴택을 출입한 지 몇 달 안되었지만 그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을로서의 예의를 지키면서도 스스럼없이 편하게 행동하는 것이 처음에는 건방져 보였다. 접대를 몇 번 받고서는 원래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려니 생각하기 시작했고, 접대 자리에서 그의 과거를 조금씩 들어가며 자기와는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게요. 사업하다가 말아먹고 나니 월급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하하”
“사업 실패로 그 뭐냐? 집도 팔고 그런 건 아니고?”
“에이, 그렇게 크게 벌리지 않아서 집도 절도 없이 쫄딱 망한 건 아닙니다. 물론 사업 자금 대출 받은 건 아직 오롯이 남아 있지만요”
호진보다 세 살 위인 강혁은 조금씩 말을 놓고는 했다. 회사도 여러 번 옮기고, 자기 사업까지 했다는 호진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강혁은 ‘당신은 좋겠네. 하고 싶은 일 다하면서 살고. 난 맨날 남의 비위 맞춰 주다가 이제 곧 오십인데. 남는 게 없어’라고 생각하곤 했다.
“오늘따라 팀장님 답지 않게 왜 축 처져 계세요? 자, 사이다 한 잔 시원하게 하시죠”
“아니 구 팀장은 광고주가 광고비 줄인다는 데도 뭐가 그렇게 신났어?”
“제가 울상 짓는다고 광고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겠습니까. 하하”
“부럽다. 당신은 늘 웃을 일이 많아서. 허허”
강혁은 호진의 모습에 오늘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호진이 그의 말을 받아 이어갔다.
“형님, 웃을 일은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더라고요. 사업 말아먹고 배운 것 중 하나예요”
호진이 은근슬쩍 형님,이라 부르는 게 강혁은 싫지 않은 듯 슬쩍 미소 지었다.
“사업은 접었는데 대출 이자는 계속 나가니 어쩌겠어요. 대출금 막으려고 종신보험을 해지했거든요. 십 년 넘게 부은 돈에서 환급금이 절반 조금 넘는 수준이더라고요”
“어이구. 아까웠겠네. 그냥 남겨두지 그랬어”
“생각해 보니 그게 내가 죽으면 나오는 돈이잖아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생각하니까 그게 부질없는거예요. 그 때부터 마음 먹은게 바로…”
호진이 자신의 소주 잔을 들어 강혁과 건배하려 내밀며 말했다.
“살아 있는 지금 웃자. 지금 기분 좋게 사는 게 남는거다,라는 거였죠”
“그래! 나도 오늘 웃을 일 만들어 보자 그럼!”
강혁이 빈 물컵에 소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놀란 표정의 호진을 보며 강혁이 웃었다.
“내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니라 안 마시는 거거든. 내 덩치를 봐봐. 술 못 마시게 생겼나. 왜 안 마시는지는 나중에 얘기해 주는 걸로 하고, 오늘은 마시자고!”
교진은 종일 더러웠던 기분이 정화된 것 같았다. 극장에서 나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 혼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오늘이 마침 그날이었다. 팀장이 아까 약속을 잡는 것 같길래 칼퇴근 후 상영 시간이 맞는 영화 중에 잔잔한 인디 영화를 선택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집에 가는 길에 달콤한 마카롱을 사가서 진한 아메리카노와 마시는 것으로 오늘 일을 지워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아, 재수’
극장에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몇 걸음 앞에 팀장과 스팅애드 담당 팀장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영화를 빨리 보려고 회사 근처 극장을 선택할 때 약간 찜찜했는데, 역시 재수 없게 걸려버린 셈이었다. 만약 조금만 빨리 나왔더라면 마주쳤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 끔찍했다. 다행히 그 둘은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한 명이 크게 손짓하며 말하자 다른 한 명은 크게 웃고 있었다. 영화에 나온 허풍쟁이 이탈리아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대행사 사람이라 그런지 나이보다 젊게 옷을 입고 다니는 광고 회사 팀장 옆의 자기 팀장이 유난히 추레해 보였다. ‘저 사람이 우리 팀장이라면 조금 나아질까’ 교진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호기심에 눈치채지 못하는 거리까지 좁혀 걸음을 빨리했다.
“이제 우리 나이 되면 다른 사람 신경 쓸 시간도 아까워요 형님. 이제 남 눈치 그만 보세요”
호진은 강혁을 택시 태우러 가는 길에 그의 왼팔에 팔짱을 끼고 확실한 형 동생 사이를 만들어 놓으려 했다. 오늘 접대의 목적이었다. 강혁은 술이 된 듯 “그럼, 그럼” 하며 오른 주먹을 쥐고 앞으로 흔들었다.
“남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한 들, 사십 넘게 살아온 사람 스타일이 어디 쉽게 바뀌나요? 생긴 대로 삽시다. 형님”
교진이 뒤에서 들어보니 전형적인 아저씨들의 신세한탄 대화였다. ‘아 구려’ 괜히 긴장하며 가까이 붙어 따라왔다고 후회한 뒤 교진이 지하철역이 있는 왼쪽 길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멀어저 가는 강혁이 큰 소리로 하는 말이 들려왔다. 교진은 깜짝 놀랐다. 영화 주인공의 대사와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는 용기를 갖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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