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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환 차장은 오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오십 번 정도 했는데, 평소보다 두 배 많았다. 컴택의 신규 스마트폰 광고 최종 시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미 두 차례 시사를 마쳤고, 대표 이사까지 컨펌이 된 광고였다. 카피 폰트 등 몇 가지 미세한 편집만 남은 상황이어서 실무들끼리만 보기로 했고, 호진은 참석하지 않았다. 팀의 최선임인 손병환 차장과 정유진 사원만 컴택을 방문했다.
“이거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나?”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 오쌍진 상무가 예기치 않게 회의실로 들어왔고 다시, 다시를 3번 연속하여 광고를 들여다보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상무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안 드시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는 컴택 마케팅 팀장인 강혁을 대신해 병환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가 무섭게 쌍진이 “당신들 다 그때 졸고 있었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모델이 여자니까 CM송은 밸런스에 맞게 남자가 부른 걸로 하자고 하지 않았나? 그 때 사장님 하신 말씀 나만 들었냐고!”
강혁 팀장이 코가 바닥에 닿을 듯이 고개를 아래로 조아리며 답했다.
“스팅 애드가 착각했나 봅니다. 분명 저도 그렇게 기억하거든요. 미리 못 챙긴 제 불찰입니다”

유진은 기가 막혔다. 컴택 대표의 말은 정반대였다. 10대와 20대 초반을 타깃으로 하는 중저가 폰이었다. 그 나이 또래 여자 모델의 일상을 담은 영상과 CM송을 만들었는데, 남자와 여자가 부른 두 종류 노래의 광고를 시사했다. 대표는 생기 발랄한 분위기로 가자며, 여자가 부른 노래를 선택했다. 다만 템포를 조금 더 빠르게 다시 한번 녹음하자고 요청 했다. 그걸 반영한 광고를 보며 쌍진이 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뭐라 사죄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자 목소리로 이 템포 적용해서 재녹음 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내일까지 다시 만들어 오겠습니다”
병환이 공손한 말투로 약속했다. 강혁 팀장에게는 새로 녹음한 노래 파일을 이틀 전에 보내주기도 했었다. 사장님 말씀하신게 딱 이런 느낌이라고, 너무 좋다고까지 말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안면몰수할 수도 있구나. 유진은 새삼 놀랐다.
“내일까지 다시 만든 후 컨펌 주시면, 다음 주 온에어까지는 문제없을 겁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죄인 마냥 굽신대며 약속을 하는 병환의 모습에 쌍진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일까지 녹음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당신?”
말이 거칠기로 유명한 오경종 CD는 자신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비스듬히 앉아 병환과 유진이 앉아있는 미팅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다. 턱수염을 거칠게 쓰다듬으며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 컴택 애들이 병신처럼 헷갈린 걸 왜 우리 보고 수습하라는 거야?”
유진은 씨름 선수 같은 덩치의 경종이 그르렁 거리는 모습에 한층 더 움츠러들었고 병환은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입을 뗐다.
“정말 죄송합니다. CD님. 미리 챙기지 못한 저희 기획 책임입니다. 그렇다고 광고주한테 니들 잘못이니 못한다고 하기도 어렵고…”
“그럼 당신이 녹음실 잡고 가수 다시 불러서 오늘 밤 안에 끝내던가. 우린 시간 없어”
“네 그러겠습니다. 녹음실은 지난번에 제가 가 봤으니 바로 가서 자리 잡을게요. 가수 연락처만 알려 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머리를 밑으로 조아리는 모습이었으나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병환의 의지에 경종은 헛웃음을 지었다.
“허 참, 이번에는 손 차장 얼굴 봐서 내가 해줄게. 마침 다른 건으로 녹음 일정 잡혔으니 잠깐 시간 내서 재녹음하면 될 거 같기도 하고. 이따 8시까지 녹음실로 와요”

“호랑이도 풀만 먹고살면 초식동물이 된다더니…”
감사하다는 말과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병환이 돌아간 후 경종이 혀를 찼다. 제작 3팀의 막내 디자이너인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호랑이요? 방금 손 차장님이? 혹시 반어법 쓰시는 거예요?”
경종이 오른손으로 펜을 빙빙 돌리며 답했다.
“지금은 상상이 안 가겠지만 저 친구 별명이 ‘리틀 타이거’였어. 박력 있었지. 제작하고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고참 카피라이터인 정식이 말을 거들며 병환의 과거를 기억했다.
“싸우긴 하는데 틀린 말은 안 했잖아요. 광고주 편을 얼마나 들던지, 그게 기획이 할 일이니까. 멋있었어요 저 양반”

병환은 호진이 스팅애드를 그만두고 영화 회사로 옮긴 1년 뒤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면접 PT에서 그가 보여준 자신감 넘치는 프레젠테이션 모습에 당시 대표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일화로 병환은 입사 전부터 유명인이었다. 대표가 병환의 팀에 “너희 팀에 이번에 물건 하나 보내줄 테니 잘 키워봐라”며 말해주기도 했다. 동기 중에서 성장도 가장 빨랐다. 2년 차부터 작은 광고주는 부사수를 떼고 혼자 관리했고, 해외 촬영에 광고기획자로 혼자 출장 가기도 했다. 대리 진급을 일 년 당겨 특진한 것에 대해 동기 중에 뒷말이 오가지 않았다. 다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AE는 말이야, 두 얼굴을 가지고 사는 거야”
병환과 함께 광고주 외근을 다녀오는 택시에서 나범호 팀장이 말했다. 미팅에서 광고주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다. 범호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안 되는 것에 대해 설명했고 광고주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끔 수위 조절을 했다. 평소에도 범호와 술자리도 자주 갖는 관계인 광고주는 흔쾌히 수긍하며 “이거 또 나 팀장님한테 말렸네요. 하하”라고 웃어넘겼다. 범호의 모습 하나하나가 병환에게는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교과서였다.
“광고주 앞에서는 광고 회사의 입장을 최대한 대변하는 거야.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반대로 회사에 돌아가서는 광고주의 입장을 대변해야 돼. 제작이든 매체든 광고주에게 도움 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거지. 그런데 그게 힘들어. 잘 못하면 양쪽에서 욕만 들어먹거든”
범호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병환에게는 작은 것부터 가르쳐주었다. 눈을 반짝이며 듣는 녀석의 모습도 기특했거니와, 가르쳐주면 바로 적용하는 민첩함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끄는 기획1팀의 막내인 병환을 범호는 유난히 아꼈다.

사람들이 범호의 이름을 딴 별명인 ‘타이거’를 고쳐 병환을 ‘리틀 타이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하는 짓이 비슷했기 때문인데, 회의하다가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며 그러고는 저녁에 소주 한잔 산다고 불러 형, 동생사이를 맺고 더 끈끈해지는 일종의 기술도 둘이 똑같았다. 가장 중요한 광고주를 맡는 ‘기획 1팀’의 선봉 팀장이라는 범호의 자부심마저 병환은 닮고 싶어 했다. 갑의 요구는 들어주되 굽신거리지 않고, 을로 살되 비굴해지지 않겠다는 범호의 술자리 이야기를 병환은 틈날 때마다 되새겼다. 나날이 성장해 간다는 느낌에 야근을 자처했고, 주말에도 일했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리틀 타이거’란 영광스러운 별명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선이 뚜렷한 사람은 팬이 아니면 적을 만들기 쉬웠고, 굳건한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특히 잘나가는 경우에는 시샘하고 견제하는 적이 생기는 법인데 범호가 그랬다. 임원 승진 케이스인 고참 부장들 사이에서 드러내진 않았지만 범호는 표적이었다. 뒤로 돌아다니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거의 범호였다. 남들이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범호와 병환이 손을 잡고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는 범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 팀장, 그게 웃을 일이긴 한데. 자네 적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야”
범호의 본부장인 문영호 전무는 진지하게 말했다. 기획 본부장은 상무급이 일반적이었으나 기획 1본부는 대형 광고주가 많은 상징성 때문에 본부장 중 가장 높은 직급인 전무가 맡고 있었다.
“아니 형님이 절 더 잘 아시면서, 웃음이 나오지 않겠어요. 이건 뭐 상대할 가치도 없는 헛소문이니”
“이제 하반기 관리 잘해야 돼. 이대로 가면 내년에 자네 임원 승진은 문제없어 보이긴 하는데, 한 발 삐끗하면 또 모르는 거야”
범호는 영호를 형님,하며 살갑게 굴었으나 반대로 영호는 자네라고 부르며 둘 사이의 거리를 쉽게 좁히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신규 하나만 개발하면 완전 게임 오버고요. 그렇죠?”
범호는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으로 누르며 두둑 소리를 내고 답했다.

범호의 3번째 큰 광고주인 올림푸스 카메라가 둑을 무너뜨리는 작은 구멍이 됐다. 마케팅 본부장이 갑자기 교체되었다. 범호와 돈독한 사이였던 본부장의 몸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신임 본부장은 기존의 마케팅을 전면 부정했다. 부임 1개월이 지나기 전에 광고 회사 교체 계획이 통보되었으나 경쟁 PT 대상에 스팅애드는 빠져 있었다. 범호는 수차례 올림푸스를 찾아갔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것이 방침이라는 답만 반복되어 돌아왔다. 주간 실적 회의에서 기획 1팀의 실적이 목표 대비 미달하기 시작했다. 답은 신규 광고주 수주밖에 없었다. 범호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광고주 개발 건을 찾기 시작했으나 생각하지 못한 난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문영호 본부장이었다.

“형님, 이러시기예요. 나보고 패전처리하라는 거 밖에 더 됩니까!”
본부장 주관 팀장 미팅이 끝나고 본부장실에 남은 범호가 영호를 향해 외쳤다. 닫힌 문 밖으로도 다 들릴 만큼 큰 소리였다.
“말 조심해라. 밖에서 다 듣는다”
“내가 가져온 정보 중에 좋은 건 다른 애들 주고, 컴택도 왜 내가 아니라 희철이 한테 주는데요? 난 쭉정이만 하라는 거잖아요. 아니면 내정되어 있어서 안될 게 뻔한 거나!”
“어차피 걔들이 어릴 때, 몇 년 전에 하다가 뺏긴 광고주 다시 가져오는 거야. 모르는 사람보다는 얼굴 익힌 애들이 낫지. 그리고 어려운 거 해오는 게 자네 특기 아니야. 타이거 실력을 이번에 보여줘 봐”
영호의 말은 변명도 아니고 덕담도 아닌, 모호한 것이었다. 범호는 알았다. 자길 내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는 것을. 영호가 빌미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좋소. 내 타이거 실력 한 번 보여줄게요. 굶주려도 풀만 먹고살진 않거든. 죽어도 맹수답게 가렵니다”
범호는 그 뒤로 영호를 형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다음 해 범호는 스팅애드를 그만뒀다. 장희철 부장이 임원으로 진급한 다음 주였다. 팀 회식도 없는 조용한 퇴장이었다. 자연스럽게 병환을 리틀 타이거라 부르는 횟수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도 타이거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병환은 딱 한 번, 범호의 집 앞에 있는 족발집에서 그를 만났다.
“여, 리틀 타이거. 그래 요즘 재밌고?”
네 달 만에 보는 타이거는 얼굴에 수염이 무성했다. 그냥 방치한 것이 아닌 듯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네 팀장님. 사실 저 기획 3팀으로 옮겼어요. 이제 증권사 광고 부사수로 일합니다. 위에 과장 하나 있고요”
“너 같은 호랑이 새끼 거둘만한 팀이 아닌데 거기가. 답답하겠는데?”
범호가 자신이 마신 잔을 손바닥으로 닦은 뒤 병환에게 넘기고 넘칠 듯이 소주를 따랐다.
“저 이젠 호랑이 아닙니다. 부모 없는 호랑이는 이제 발톱을 숨기려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사람은 성질대로 사는 거야. 난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었고. 그런데 넌 아닌 거 같기도 했어. 좀 헷갈렸거든”
병환이 한 번에 비운 술잔을 두 손으로 감싼 후 범호에게 다시 돌려줬다.
“너 편한 대로 해. 무작정 나 따라 하지 말고. 그래야 오래간다. 난 적을 너무 많이 만든 거 같아. 넌 그러지 마라”
“그래도 억울해요. 억울해서 속상해요. 왜 잘하는 사람이 공격을 받는지 모르겠어요. 자기 생각을 떳떳하게 내비치는 사람이 왜 적이 생기는 건지…”
병환이 범호에게 따를 소주 병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를 보며 범호가 말했다.
“회사라는 건 내 뜻을 펼치기 위해 다니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생존하기 위한 밥벌이 수단이라는 거, 잊지 마”
그날 두 사람의 테이블 위에 놓인 족발은 인기가 없었다. 빈 속에 들어가는 소주병만 늘어갔다.

가끔 문자를 주고받던 둘의 연락이 완전히 끊긴 것은 병환이 과장 진급을 했을 때 즈음이었다. 미국에 사는 누나네 사업을 도우러 간다는 것이 범호의 마지막 근황이었다. 병환의 과장 진급도 동기들 중에 가장 빨랐다. 당연히 뒷말이 있었다. ‘인사팀장에게 명절마다 한우세트를 보낸다’, ‘저 사람 손바닥에는 지문이 없을 거다’, ‘도대체 죄송합니다, 말고 하는 말이 없다’ 등이었다. PT에 한 번도 나가지 않는 과장은 병환이 유일했다. 기획서도 쓰지 않는 과장임에도 그의 쓰임새는 독보적이었는데, 팀장들 사이에서는 ‘총알받이’이라고 불렸다.
“우리 팀에도 손 과장 복제인간 있으면 좋겠어요. 매번 광고주한테 욕 들어먹는 것도 지겹고”
“그게 다 내 복입니다. 장 팀장님도 전생에 덕을 쌓았어야죠. 손병환 한 명이면 광고쟁이 짓하면서 받는 스트레스 반이 없어진다니까요”
“내 말이. 사고 수습하는 데는 타고 났어요. 진짜 재능이야”

내세우지 않는다. 싸우지 않는다. 굽히고 숙인다. 병환은 호랑이의 길을 버렸다. 풀만 먹어도 배가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기들 중 차장 진급 1호도 병환이었는데, 이젠 입사 동기들 중 남아있는 사람이 둘뿐이라 큰 의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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