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호진은 예전에 한 번, 같은 감정을 가졌던 적을 떠올리려 했다. 언제였는지 바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파트와 건물이 보이는 서울 시내를 지날 때까지 몰랐다가 경기도로 접어들어 풍경이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야 기억났다. 군대에서 첫 휴가 나왔던 때,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서의 막막함과 서글픔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며칠간 같이 있다가 돌아가는 아들이 서운해서인지 엄마는 음식을 잔뜩 했다. 밥상에 호진이 좋아하는 반찬이 가득했지만 몇 술 뜨지 못했다. 군 생활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대 앞까지 아버지가 운전해 주셨다. (호진을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길에 5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진저리를 친 아버지는 다시는 데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호진은 방으로 ..
토요일 오후 카페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호진이 들어갔을 때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커플이 마침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호진은 의자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아내가 요즘 저기압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오늘 아침에 아내는 또 한 번 폭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집에 같이 있다가는 자기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아 서둘러 도망쳐 나온 길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남은 아들은 방에 갇혀 밀린 숙제를 하며 눈치 볼 것이 뻔해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이 집에 있으면 오히려 아내의 화를 돋울 것 같았다.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아내의 독기 서린 표정만 눈앞에 그려질 뿐 왜 그런지 헤아릴 수 없었다. 호진은 작게 한숨 쉬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연결했다. 거의 십 년째 쓰고..
91년 방배동의 한 중학교 교실, 쉬는 시간이었다. A와 B가 씩씩거리며 호진에게 다가왔다. “야, 소방서하고 우범 지대, 둘 중에 뭐가 더 촌스럽냐?” 이해를 못했다. 둘 중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호진의 질문에 답하는 듯, 둘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Fire House(소방서)는 안전을 지키는 곳이잖아. Skid Row(우범 지대)가 뭐냐? 구질구질하게” “록 스피릿을 모르는 너 같은 애한테 무슨 말을 더 하냐. 빈민층의 울분을 담은거잖아” “하, 그러면서 죄다 사랑 노래잖아. 솔직히 세바스찬 바흐 얼굴 말고 뭐가 있냐, 스키드 로우가” “사랑 노래, 웃기고 있네. 파이어 하우스야 말로 록이 아니라 팝이지. 이름도 촌스러워서” 서로 좋아하는 밴드 중 누가 더 낫냐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