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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의 풍경을 보며 호진은 예전에 한 번, 같은 감정을 가졌던 적을 떠올리려 했다. 언제였는지 바로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파트와 건물이 보이는 서울 시내를 지날 때까지 몰랐다가 경기도로 접어들어 풍경이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야 기억났다. 군대에서 첫 휴가 나왔던 때, 다시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서의 막막함과 서글픔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며칠간 같이 있다가 돌아가는 아들이 서운해서인지 엄마는 음식을 잔뜩 했다. 밥상에 호진이 좋아하는 반찬이 가득했지만 몇 술 뜨지 못했다. 군 생활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대 앞까지 아버지가 운전해 주셨다. (호진을 데려다주고 집에 가는 길에 5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진저리를 친 아버지는 다시는 데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호진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가슴은 계속 두근두근 진정되지 않았고 출발하기로 한 오후 3시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다. 호진은 집에서 나와 강남역으로 갔다. 낮 시간이라 아직 한적한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조수석에 앉고 호진은 뒷좌석에 있었다. 차가 강원도로 접어들자 산과 밭, 논 만 보이는 풍경이 시작되었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던 때의 기분이 이십 년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호진에게 찾아왔다. 머릿속에는 집에 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면 이 길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를 바랐다.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이 길 뒤에 있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있어야만 하는 곳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빨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출근하려 신발을 신던 호진에게 아내가 말했다. 호진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긴 대화를 나눈 다음 날이었다. (셋이 모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었고, 작정하고 모인 것은 좋은 일 때문이 아니었다) 이 상황이 누구 때문이다. 누가 잘못한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의미가 없었다. 각자 화가 나 있었고, 지쳐 있었다. 하는 행동과 내뱉는 말이 진심과는 다르게 전해지는 동안 가시가 돋아나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가 계속된다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접어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집안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당분간 떨어져 지내는 게 좋겠다는 아내의 제안을 호진은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E도 아빠랑 같이 있기 싫대”
호진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아들을 바라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동안 식탁 테이블에 향해 있던 얼굴을 들어 아들을 향했을 때는 이미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였다. 아들은 호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 내가 나갈게” 호진은 짧게 말한 후 먼저 식탁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화가 나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아무 감정과 생각도 없었다. 침대에 눕자 거짓말처럼 금방 잠에 빠졌다.
호진은 핸드폰 화면을 보며 두 개비 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엄마’라는 단어 아래 녹색 통화 버튼을 쉽게 누를 수 없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지, 어떻게 해야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회의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엄마. 저예요. 밝은 목소리를 연기하는 호진의 톤이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다.
“그래. 집에 와서 있는 건 얼마든지 그러렴”
엄마는 무슨 일인지 깊게 묻지 않았다. 큰일 아니예요. 조금 떨어져 있어 봐야 서로 소중함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호진이 생각해도 뻔한 말이 이어졌으나 엄마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들의 조그만 실수와 잘못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자신이 한심한 아빠였다는 사실을 호진은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회사 근처의 원룸을 알아봤다. 몇 달간 단기 임대도 가능한 곳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월세는 부담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혼자 낯선 방에 들어가 불을 켠 후 풍경의 적막함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는 집, 자신이 결혼 전까지 살던 집, 아내가 출장 가 없는 주말이면 어린 E와 찾아가 하룻밤을 보내고 오던 집. 그 집이 떠오르자 더 이상 다른 곳을 생각할 수 없었다. 하나 걸렸던 것은 두 분의 걱정이었다. 별일 아니라고,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금세 다시 좋아질 거라며 안심시켜드리기 위한 말은 사실 호진의 바람이기도 했다.
긴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으나 여행과는 달랐다. 출퇴근을 해야 했고 주말을 보내야 했다. 트렁크는 쉽게 가득 찼고 여분의 가방까지 필요했다. 지하철로 움직이기 여의치 않았다. 아내는 차로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시부모님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지 않는 강단에 호진은 고마움과 함께 약간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E는 같이 가기 싫다고 했다. 하기 싫다는 것을 두 번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을 대하는 법임을 충분히 배웠기에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헤어지는 길에 어쩌면 셋이 이런저런 이야기라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호진은 접어야 했다.
그 길은 일직선이었다.
왕복 8차선의 도로를 한 번의 회전도 없이 그대로 운전해 가면 부모님의 집이 나왔다. 하지만 호진은 운전해서 가는 것보다 버스를 타고 오가는 것을 더 좋아했다. 도심을 빠져나가 전원의 풍경을 거쳐 서울 인근의 소도시로 접어드는, 한 시간 정도의 여정은 마치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다. 책을 읽다가 창밖을 볼 때 변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의 어깨에 기대 잠든 아들의 가냘픈 무게를 느끼는 것이 좋았다.
그 길을 또 한 번 일직선으로 연장하면 아내가 살던 집까지 닿았다.
늦은 밤 아내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적했다. 차가 거의 없는 일직선 길이었지만 운전을 과격하게 하지 않는 편인 호진은 속도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뛰는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때면 음악을 크게 틀었다.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그녀와 나눴던 대화에 따라 고르는 음악은 달랐다. 하루는 여러 앨범을 넣어 구웠던 CD에서 묘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멜로디는 슬픈 듯하면서도 밝았고 보컬의 목소리는 무심한 듯하면서 애잔했다. 몽환적인 곡의 분위기가 연인과 헤어져 집에 가는 호진의 기분에 착 달라붙었다. 나중에 곡 이름을 찾아보니 피쉬만즈의 Go Go Round the World였다.
“음악은 내가 듣고 싶은 걸로 틀게”
예전의 그 곡을 듣고 싶다고 말할까 싶었다. 그 곡을 틀어놓고 연애 시절 이야기를 꺼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으나 한 번 같이 들으면 어떨까 싶었다. 시동을 켜자 이미 연동되어 있던 아내 휴대폰의 음악이 바로 플레이되었다. 계속 이어지는 곡은 E가 좋아하는 귀멸의 칼날의 시즌 별 주제가와 극장판의 곡들이었다. “이거 다 E가 고른 거야” 아내가 말했다. 호진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러니까 호진과 사이가 틀어지기 전에 E는 호진의 핸드폰에도 같은 곡들을 자기의 이름으로 모아놓았었다. 그 플레이리스트는 한동안 틀어질 일이 없었다.
호진은 운전석 대각선 뒷좌석에 앉았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조수석을 열었을 때 아내의 짐이 놓여 있었고, 뒷좌석이 비어있었다. 여자가 운전하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남자. 대화가 없는 차 안의 풍경은 며칠 전 호진이 본 영화의 장면과 동일했다. 집안의 분위기가 냉랭해진 후, 호진은 귀가 시간을 늦추기 위해 이곳저곳을 배회하곤 했다. 때로는 퇴근 시간에 맞춰 시작하는 영화를 봤다. 그날의 대화 다음 날 본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였다. 자기 전 호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영화 생각에 침대에 누워 비평글을 찾던 중, 눈에 들어온 글을 읽은 후였다.
- 하나의 세계가 끝났음을 뒤늦게 받아들이는 남자 이야기
아침이 됐다. 아내는 오랜만에 식사를 차려줬다. 호진이 좋아하는 생선구이 등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호진은 깨끗이 비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아들 방문을 노크했다.
“또 보자”
아무 말도 없는 E에게 인사하고 나왔다. 직선의 그 길은 주말임에도 막히지 않았다. 부모님의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곧 차에서 짐을 내리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무슨 인사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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