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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카페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호진이 들어갔을 때 노트북 전원을 꽂을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커플이 마침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호진은 의자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아내가 요즘 저기압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려 했다. 오늘 아침에 아내는 또 한 번 폭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집에 같이 있다가는 자기에게도 불똥이 튈 것 같아 서둘러 도망쳐 나온 길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남은 아들은 방에 갇혀 밀린 숙제를 하며 눈치 볼 것이 뻔해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이 집에 있으면 오히려 아내의 화를 돋울 것 같았다. 이리저리 생각해 봤지만 아내의 독기 서린 표정만 눈앞에 그려질 뿐 왜 그런지 헤아릴 수 없었다. 호진은 작게 한숨 쉬며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연결했다. 거의 십 년째 쓰고 있는 구닥다리 맥북이었지만 간단한 동영상을 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넷플릭스에 접속해 아무 영화나 틀었지만 내용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짚어내는 데서 시작합니다. 진짜 원인을 찾아내는데 성공한다면 사실,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죠”
지난주에 장희철 상무가 추천해서 본 ‘문제 해결’ 강의 영상 내용이 귀에 맴돌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몇 주째 화를 내고 있는 아내에게 호진 또한 몇 번 감정적으로 반응한 적이 있었다. 매번 싸움으로 이어졌고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한 결과로 끝나기 일쑤였다. 악순환이었다. 아내의 모습에 호진도 짜증만 냈을 뿐 ‘왜 그럴까’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문제 해결 과정을 한 번 접목해 볼까. 호진은 영상을 닫고 엑셀 프로그램을 열고 첫 번째 행에 아래와 같이 입력했다.

문제 – 아내가 집에서 짜증을 낸다
원인 –

원인이라는 단어 뒤에서 입력을 기다리는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잘 못한 게 있을까. 아들 녀석이 숙제를 너무 안 해서 그런가. 아들 친구들과 비교가 되는 게 기분이 나쁜 걸까. 아니면 어디 기사에서 본 것처럼 갱년기 우울증이 온 것일까. 몇 가지 대안이 떠오른 호진은 일단 아들에게서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원인 1 – 아들이 요즘 애니메이션에 빠져 숙제를 안한다

주말이라 잠에서 깼지만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었다. 침대 위에 누워 꼼지락거리던 호진은 “야 구은호! 너 단어 테스트 결과가 이게 뭐야!”라는 아내의 일갈에 눈이 번쩍 떠졌지만 잠시 움찔했을 뿐, 이불 속으로 한층 웅크리며 파고들었다. 잠시 뒤 잠잠해진 틈을 타 살그머니 아들 방으로 들어가 보니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열심히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들의 등이 보였다. 안쓰러운 마음에 다가서니 빈 종이에 ‘귀멸의 칼날’ 등장인물을 그리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게 그렇게 좋아?” 어이없는 표정의 미소가 호진의 입에 걸려 있었다.
“응 기유야. 멋지지?” 아들이 태블릿 PC 화면의 이미지와 비교하며 비교해 보라고 자랑했다.
얘가 이러는 게 다 아빠 때문이야. 호진은 몇 번이나 타박을 들었다. 일본에서 기록적인 인기를 얻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뉴스를 접하고 호기심에 다운로드해 보기 시작한 것은 호진이었다. 대여섯 편 정도 보고 있을 때 아들이 뭐 보냐고 관심을 갖길래 같이 보기 시작한 게 일이 커졌다. 푹 빠져 버린 아들은 주연, 조연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의 이름과 기술을 물론 좋아하는 음식 등의 사소한 설정까지 다 외워 버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거에 몰입하는 능력 하나는 알아줘야겠다. 아빠는 너 이런 모습 나쁘지 않아” 호진은 아들이 암기한 것을 줄줄 읊어댈 때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부에 꽂히게 되면, 이 집중력이 거기에 발휘하겠지. 그럼 엄마도 기뻐할 거야”
“그런데 난 숙제는 싫은데”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재미 붙이게 될 거야. 아빠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막 ABC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뭘”
“난 지금 그거보단 훨씬 잘하는데”
“맞아. 그러니까 네가 더 대단한 거지. 이번에 단어 시험 잘 보면 아빠랑 같이 귀멸의 칼날 피규어 사러 가자. 엄마한테는 비밀로 할게”
“기유 액션 피규어 있을까?”
호진이 아들에게 눈을 찡긋하고 오른손 엄지를 세웠다. 없다 해도 다른 좋아할 만한 것들이 무수하게 많을 테니까. 방문을 닫고 나가려는 호진이 돌아보니 아들이 마지못한 듯 영어 책을 펴고 있었다. 흐뭇한 마음과 함께 짠한 기분이 들었다.

아들이 공부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아내는 예전에는 공부로 아들을 닦달하지 않았다. 초등 고학년이 됐다고 해서, 친구 엄마들의 학구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낼 사람은 아니었다. 호진은 이 가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의에서 배운 ‘문제의 핵심’이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였다.

원인 2 – 아내에게 갱년기가 왔다

단언컨대 아내는 호진이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 중에 가장 예쁜 사람이었다. 결혼 전에 처음 만난 처남이 술이 조금 들어가자 누나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형 그거 알아요? 크리스마스랑 누나 생일날이면 집에 선물이 넘쳐났어요”
만화 같은 이야기였다. 동네 인근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여학생이 아내였다고 했다. 옆 학교의 남학생들이 학교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건 예삿일이었다는 이야기가 호진에게 허풍처럼 들리지 않았다. 솔직히 호진은 지금까지도 아내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곤 했다.
“그러게요. 아내가 전생에 큰 잘못을 했나 보죠. 반대로 전 좋은 일을 많이 했고” 아내의 미모에 대한 칭찬을 들을 때면 농담처럼 하던 말을 언제부턴가 호진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믿게 되었다. 패션모델과 의류 디자이너 일을 함께하던 아내는 출산 후에도 일을 계속했다. 업계에 애정이 많았고 본인의 직업에 자부심도 컸기에 일을 쉽게 포기할 거라 호진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챙길 것이 부쩍 많아졌고 일과 본격적인 육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아내는 큰 고민 없이 아들을 택했다. ‘일은 다시 할 수 있지만 은호와의 시간은 다시 찾을 수 없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는 아내에게 후회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 힘들었겠지’ 호진은 노트북 화면을 보며 조그만 소리로 혼잣말했다.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스트레스가 쌓였을 것이다. 계절마다 해외 패션쇼에 참석하던 아내는 활동의 폭이 집과 유치원, 가끔은 병원 등 극단적으로 좁아졌다. 맞벌이였던 때보다 수입도 절반으로 줄었다. 들어가는 돈은 늘어나는데 생활이 쪼들리는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천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든 상황 때문에 화를 낼 성격은 아니라고 호진은 확신했다. 선하고 공정한 성격은 유전인 것 같았다. 아내의 엄마, 그러니까 호진의 장모님과 성격이 꼭 닮은 아내였다. 장모님은 주변 사람을 워낙 잘 챙기고 남을 위하는 분이어서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의 생불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었다. 갱년기의 영향이 있다고는 해도 그것 때문에 아내가 화를 내는 것은 아닐 거야. 호진은 이 가설도 기각했다.

더 이상의 원인이 생각나지 않았다. 강의에 따르면 원인이 명확하면 해결 방법은 쉽게 나온다고 했지만 이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으니 생각의 진도를 뺄 수가 없었다. 액셀 창은 놔둔 채 호진은 다시 넷플릭스 창을 열었다. 며칠 전 만났던 재원이 추천해 준 ‘극주부도’라는 애니메이션이 인기 Top 10에 올라와 있었다. 영화 업계에서 알게 된 후배이자 여전히 시네마 키드인 재원이 극찬하며 했던 말이 기억났다.
“형, 난 평생 결혼할 계획은 없지만, 이걸 보면 한 번쯤은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미쳐 아주. 형도 꼭 봐”
호진의 취향은 아니었다. 짧은 분량의 소설을 엽편 소설이라 부른다면 극주부도는 ‘엽편 애니’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5분 내외의 코미디였다. 재미는 있었으나 알콩달콩한 주인공 부부의 이야기에서 호진은 가슴 한 편이 살짝 긁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상을 틀어놓고 멍하니 바라보던 호진은 시장기를 느꼈다. 시간이 다섯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 컵라면 하나를 후닥닥 먹은 것이 다였다고 생각하니 허기가 더 맹렬해졌다. 하지만 집에 가서 저녁 식사를 차려 달라고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호진은 근처 순댓국집에 들러 반주로 소주나 한 병 하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방을 쌌다.

그날의 고민을 까맣게 잊은 채 삼 주의 시간이 흘렀다. 호진은 그동안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정확히는 마시지 못했다. 건강검진 결과에서 지방간 수치가 전년보다 너무 올랐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덤으로 당 수치도 위험 수준까지 올랐다며 의사와의 상담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더 나빠지면 일상생활 지장 받으실 겁니다. 세달간 음주는 절대로 하지 마시고 꾸준히 유산소 운동하세요”
시큰둥한 말투의 기계적인 멘트가 아니었다. 안경 너무 부릅뜬 눈으로 강조하는 의사의 표정에서 호진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 수 있었다. 세 달 뒤 재검 일정을 잡고 상담을 마친 호진은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건강검진 이후 무언가 제대로 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광고 회사 생활로 돌아온 후 야근과 광고주 접대가 잦아졌고 식생활이 불규칙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호진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독한 마음으로 금주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모임을 제외하고는 저녁 자리를 잡지 않았고 참석하더라도 술은 마시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막상 어려운 것은 혼술을 참는 것이었는데, 영화 홍보대행사 사업을 할 때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직원들을 퇴근시킨 후 사무실에 혼자 남아 고민할 때 한 병씩 마시던 것이 거의 매일로 이어지게 되었다. 술 약속이 있는 날과 혼술을 더하면 거의 주 7일 가까이 술을 마셔온 것이 몇 년째 이어져 왔다. 호진 스스로 줄여야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저녁 시장기를 느낄 때면 소주가 떠올랐고, 다시는 입맛이 함께 찾아왔다.

어떻게든 술 생각이 나지 않도록 해야 했고 그러려면 환경을 변화시켜야 했다. 호진은 저녁 식사에서 안주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메뉴를 최대한 피했다. 한식 반찬과 국, 찌개 등은 어쩔 수 없이 술 생각으로 이어졌기에 호진이 선택한 것이 빵이었다. 인터넷으로 토스터 기계를 주문했다. 집 앞 마트에 들러 식빵과 크림치즈, 딸기잼, 피넛버터 등을 사 왔다. 텁텁한 빵을 먹으면 주스 생각이 났지 소주와 맥주가 당기지 않았다. 빠질 수 없는 저녁 약속 자리에서는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한 뒤 소주 잔에 사이다를 받아 마셨다. 탄산가스로 배가 금세 차오르고 단 맛 때문인지 안주에 손이 가지 않았다. 술과 저녁 음식 섭취가 줄어드니 체중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여를 지내오니 귀가가 빨라졌고 저녁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엔 알코올 기운이 없는 저녁이 어색했다. 호진은 무엇을 할지 몰라 조마조마해 하다가 그냥 담배 한 대 피우고 일찍 잠들곤 했다. 멍하니 있던 며칠이 지나자 할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몇 년간 손을 놓고 있던 골프채를 다시 잡고 연습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장희철 상무가 날이 풀리면 광고주와 필드 회동이 있을 수 있으니 준비하라고 했던 차에 잘 된 일이었다. 아들이 숙제를 물어오면 영어는 쉽게 답해줬지만 수학은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호진은 성인을 위한 교양 수학 책을 사서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요즘은 맨정신이라 이야기가 통하고 좋아” 아들 숙제를 봐주다가 잠깐 드래곤볼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예전에 술은 자주 마셨지만 취한 적은 없는데”
“아니야, 아빠가 술 냄새날 때마다 이상한 말해서 나랑 엄마 기분 나쁘게 했는데”
지나가는 듯한 아들의 말이 호진에겐 충격이었다. 스스로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셨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늘 취해서 실수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내와 아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해 보니 호진은 아찔한 기분이었다.

혼자서 빵을 챙겨 먹은 지 3주 정도 되었을 때 아내가 호진에게 저녁을 차려주기 시작했다. 빨갛고 자극적인 요리는 피하고 담백한 것들로 식탁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호진은 알 수 있었다. 호진이 아들 방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옆에서 공부하다가 물어보는 문제를 알려주기도 하다 보면 아내가 방으로 왔다. ‘애 공부하는 것 방해하지 말라’는 말에 싫은 눈치가 담겨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숙제를 다 마친 아들이 이제 게임을 하겠다고 했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만화 영화를 보여주려고 호진이 맥북을 열었을 때 바탕 화면의 엑셀 파일명이 눈에 들어왔다.
‘문제 해결’
열어본 엑셀 시트에 호진이 예전에 카페에서 입력한 문구가 있었다.
‘검증된 원인 가설과 해결 가설 중 실행할 것을 결정하고, 조직의 자원을 지원받는다 - 그런데 원인이 뭔지 아직 모르겠네… 미치겠다’
호진은 파일을 닫으며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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