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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아무것도

은고랭이 2022. 12. 24. 09:45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세 번 읊조리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안심될 때가 있어

 

나를 향한 네 눈길에 더 이상 아무 감정도 없음을 알아채는 것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이 결국 무엇도 남기지 못했음을 곱씹는 것도

난 빈 껍데기만 남아 있음을 이제야 깨닫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다짐하다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누가 무엇을 잘 못했기에 이런 걸까를 생각하다 보면 화를 누를 길 없기도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늘 한 번 보고 조용히 입 밖으로 내뱉어 보면

크게 뚫려 있는 가슴속 구멍으로 

차갑지만 시원한 바람 한 줄기 흘러들어가는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이제 곧 아무것도 아니게 될

이 공간과 물건, 냄새와 소리에 가끔은 

난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렸구나, 생각이 들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중얼거려야만 겨우 무너져가는 마음을

움켜쥐고 버텨나갈 수 있는 내가 있는데

너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미칠 때면

더없이 쓸쓸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이상 아무것도

무엇 하나 남지 않은 채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닐 시간만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 내 앞에 길게 늘어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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