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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또 저기 앞 사거리까지 가서 유턴할 거지?”
경미의 장난스러운 핀잔에 운전대를 잡은 희정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반대편 차선이 비어있어 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했지만 희정은 표지판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쳤다. 조수석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경미는 포기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어. 한두 번도 아니고. 그래, 안전하게 가자.”
둘이 탄 차는 삼백 미터 정도를 더 직진한 뒤 유턴해서 아까 그곳으로 돌아온 후 우회전했다. 영어 학원이 있는 길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온 아이들과 부모들이 세워놓은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경미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창문을 내리고 밖을 두리번거렸다.
“응 준호야, 이모야. 엄마랑 같이 지금 막 도착했어. 조금 늦었네, 미안. 밖으로 나와 있니?”
“저기 보인다”라고 희정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보조 등을 켜고 차를 잠시 세운 사이에 키가 껑충한 소년이 뒷좌석 문을 열고 탔다. 그러고는 볼멘 말투로 말했다.
“그냥 버스 타고 가면 된다고 했잖아. 내가 애도 아니고. 안 와도 된다고.”
아이와 어른의 목소리가 물 잔 속에서 잉크 방울이 퍼지 듯 섞여 들렸다. 희정이 다시 차를 출발시켰고 경미가 뒤를 돌아 보며 말했다.
“엄마 또 며칠 동안 못 볼 건데, 좋으면서 그런다 이 녀석. 그리고 넌 아직 아기야.”
셋이 함께 집에 돌아온 후 준호는 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희정도 출근 준비로 바빴다. 경미는 혼자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둘이 사는 집 분위기가 나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더니’라고 생각할 때 희정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방금 전까지 머리를 만지고 짐을 싸는 등 비행 준비를 했던 방은 원래 남편의 서재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헤어진 지 햇수로 이 년째. 친자매 사이는 아니지만 피붙이 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경미는 그때 희정이 어둡고 긴 터널을 헤쳐 나올 수 있도록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도운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장거리네. 어디라고 했지?”
“시드니.”
“맞다. 개드니. 언니 고생 좀 하겠다”라며 경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항공사 객실 승무원으로 막 일을 시작했을 때 이 년 선배이던 희정과 처음 만났다. 신입이라 모든 게 서툴렀던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던 희정을 곧잘 따르던 경미는 십 년을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직장 동료 사이를 넘어 가족 같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얘 좀 봐. 너 혹시 학원에서도 개드니라고 부르는 거 아니지?”
희정이 기가 막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장거리 운항 노선 중 시드니는 정반대의 시차와 유난히 까탈스러운 승객이 많기로 악명이 높아 승무원 사이에서 ‘개드니’라는 악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런 생생한 내용을 더 좋아하네요. 그렇게 고리타분한 사고를 하셔서 어린 MZ 승무원들을 어떻게 이끄시려나. 우리 사무장님 걱정이네”라고 말하며 경미가 소파에서 일어나 희정의 말아올린 머리 뒤쪽을 매만져줬다.
“여기 좀 흐트러졌다, 이제 됐네. 언니 미모야 여전하지만, 이제 우린 흐트러진 모습 보이면 안 되는 나이잖아. 예쁜 것보다 단정하다는 말이 듣기 좋더라고, 요즘은.”
경미가 만족스럽다는 듯 자신의 두 손바닥을 가볍게 마주치고는 싱긋 웃었다.
경미의 이런 마음 씀씀이를 대할 때면 희정의 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촛불이 켜진 것 같은 다정함이 일었다. 동생이지만 언니같이 느껴질 때가 더 많은 속 깊은 아이다. 희정 자신은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경미는 승무원 생활 10년을 딱 채우고는 그만뒀다. 그러고는 승무원 취업 지망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학원을 차렸다. 처음부터 그쪽 생각을 했던 건 아니라고 했다.
“원래는 이런저런 부탁으로 개인 과외라고 하나, 한 명씩 승무원 준비하는 애들을 코칭 해줬거든. 돈도 안 받고. 그런데 내가 봐 준 애들이 다 취업이 잘 되는 거야. 그렇게 입소문이 나더라고. 승무원 족집게 일타 강사라나?”
그렇게 버는 부수입이 짭짤하다고 경미가 말한 지 일 년 후, 제대로 해보겠다며 학원을 운영하기로 마음먹고 승무원 생활을 접었다. 워낙 말솜씨가 좋은 아이였고, 현실적인 내용으로 강의를 해준다며 인기를 끌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경미 혼자서 운영했지만 곧 강사진을 늘려갔다. 승무원 선후배들 중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속속 합류했고, 경미는 어엿한 학원 대표가 되었다. 강사진이 늘어나면서 경미는 커리큘럼을 구상하거나 중요한 몇 개의 강의만 맡아서 진행했다. 경영을 담당하는 사무직원도 고용했다. 그렇게 늘어난 여유 시간을, 비행을 하면서도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하는 희정을 위해 쓰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언제나 되어야 학원일 같이 하자고 할 거냐며 희정이 농담 삼아 서운함을 내비쳤을 때 “언니는 이쪽이랑 안 맞아. 남 앞에서 있어 보이는 척도 하고, 좀 뻥도 치고 그래야 하는데. 영 그쪽에 소질이 없잖아”라며 경미는 웃었다.
이혼 직후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며칠을 떨어져 비행을 가야 할 때면 희정은 심각하게 경미의 학원에서 일하는 걸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언니 어렵게 사무장까지 승진했는데, 내가 아까워서 강사로 못 받겠다며 엄마 없는 날마다 경미가 집에서 준호와 함께 지내면서 희정의 빈자리를 대신해 줬다. 이번 나흘간 비행에서도 경미는 자신을 대신해 준호를 살뜰히 보살펴줄 것이다. 사춘기가 왔는지 엄마 앞에서는 무뚝뚝하게 굴어도 경미 이모에게는 꽤 재잘대며 이야기도 곧잘 하는 아들이다.
그런데 왜 경미는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는 걸까.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혹시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진 걸까. 이혼하는 과정을 속속들이 지켜보고는 환멸이 난 걸까. 인천 공항으로 향하는 운전 길에 희정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이구, 우리 도련님 이제 일어나셨어요. 공부하다가 늦게 잔 건 아닌 것 같고.”
눈을 비비며 방문을 열고 나온 준호에게 식탁에서 노트북으로 강의안을 검토하던 경미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모 어제 집에 갔다가 온다고 하지 않았냐는 준호의 말에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아냐고, 아침에 와서 언제 너 일어날까 기다렸다고 경미가 말했다.
“하긴 매일 늦게까지 학원 다녀오는 애가 토요일에는 늦잠 좀 자고 쉬어야지. 얼른 나갈 준비해. 밥도 밖에서 먹고 오늘은 너 옷 좀 사자.”
중학교 입학 후 키가 부쩍 크고 있는 준호는 작년에 입던 가을 옷이 벌써 작아졌다. 이번 주말에 이모가 데리고 나가 몇 벌 챙겨줄 계획이었다. 요즘 연예인이 나오는 유튜브를 보면서 멋 내는데 관심이 생긴 준호는 평소처럼 뭉그적 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후 세수하러 재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왜? 이 가방 마음에 안 들어? 요즘 엄청 유행한다고 하던데.”
쇼핑몰 가방 매장에서 경미가 가방을 손에 들고 준호의 등에 대어 보고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좋네. 크기도 우리 준호한테 딱 맞고. 이거 비싼 거야. 이모가 큰맘 먹고 사준다고 할 때 얼른 집어.”
경미의 호들갑에도 준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 셔츠와 바지를 서너 벌 산 이후, 평소 눈여겨봤던 가방을 사는 것으로 조카를 위한 쇼핑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쓰던 가방이 군데군데 헤져 있던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준호는 매장 반대편에 걸려있는 크로스백 쪽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백팩 말고 크로스백이 좋았구나, 근데 학교에 가지고 다니려면 불편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며 그쪽으로 향하던 경미는 발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많이 봤던 익숙한 모양의 올리브색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준호가 바라보는 게 그것임을 알 수 있었다. 경미도 아주 오래전부터 봐온, 헤어진 아빠가 들고 다니던 가방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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