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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럴 거면서 왜 그리 서둘러 결혼했는지. 경미는 준호와 쇼핑을 마친 후 돌아와 희정네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곳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흰 벽지 아랫부분에 어린 준호가 그려 놓은 낙서만 남았다.

9개월 만에 둘은 결혼했다. 준호를 먼저 가진 속도위반은 아니었다. 한창 사랑에 빠진 남녀가 그렇듯 그들은 한순간도 떨어져 있기 싫었다. 너무 빠른 결정 아닌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아봐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경미의 만류에도 희정은 앞으로 펼쳐질 행복을 굳게 믿었다. 준호 돌 기념으로 찍은 셋의 사진에서도 이 행복이 영원하리라는 확신이 그녀의 얼굴에 환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희정을 배신했다. 준호 아빠의 외도 때문이었다.

 

“에고, 우리 사무장님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 개드니 비행이 힘들긴 해. 그치?

캐리어를 끌고 현관에 들어온 희정을 경미가 가볍게 안은 채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희정은 이제부터 한 승객이 접수한 서비스 불만 내용 관련해서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내일부터 나흘 정도 쉬지 않아? , 화요일에 준호 학교 공개 수업도 있고.

“어쩜 네가 이제 나보다 더 학부모 같네.

“이거 공짜 아니야. 이모가 업어키웠으니 나중에 준호 성공하면 노후 보장하라고 할 거지롱.

경미가 혀를 날름 내밀고는 얼른 일 마무리 짓고 준호랑 밖에 나가서 고기 먹자고 했다. 장거리 비행을 다녀올 때마다 둘이서 하던 작은 의식이었다. 힘들게 돈 벌었으니 소고기로 몸보신하는 날.

 

“언니, 이제 영영 준호랑 둘이서만 살 거야?

경미가 방금 비워낸 캔맥주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희정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셋이 식사하고 돌아온 후 준호는 쇼핑하러 돌아다니느라 피곤했는지 일찍 잔다고 방으로 들어갔고, 고기 먹을 때 소주 몇 잔을 마신 경미는 오늘 술이 받는다면서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줏거리를 사 왔다.

“난 한 번 갔다 왔잖아. 아직 싱글인 네가 할 말은 아닌 듯?

희정이 입술을 샐쭉이며 경미를 보고 웃었다.

“이거 왜 이래. 난 길게 가진 않아도 가볍게 스치듯 만나는 사람은 쭉 있었다고. 언젠가 결혼 생각이 들면 할지도 모르지 뭐. 그런데 언니는 다르잖아. 결혼 전에 연애를 많이 한 편도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히 누가 봐도 괜찮은 여자고. 게다가 준호 생각하면 아빠 될 사람이 있어야 든든하지 않겠어?

“그게 마음대로 되니. 그리고 아직…”

희정이 말끝을 흐렸다. 이어지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전 남편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남자라는 족속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는 것인지 경미는 알 수 없었다.

 

“언니, 근데 나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어.

“뭘?

“굳이 들춰내기 뭐 해서 그동안 안 묻고 있었는데…” 경미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왜 준호 아빠, 여자 생긴 거 어떻게 알게 됐는지. 언니가 직접 봤다고 했잖아.

“아. 그거…”

희정이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빨랐나. 경미는 후회했다. 이 년이면 상처가 아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했는데.

“비보호 좌회전을 할 때였어.

희정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가족사진이 걸려있던 벽을 향해 있었다.

 

유럽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늦은 오후였다. 희정은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들러 그를 태워 집에 돌아가면 좋겠다 생각했다. 운전을 좋아하는 희정과 달리 그는 면허는 있지만 자기 차를 가진 적이 없었다. 결혼 후에 가족이 함께 차로 이동할 때도 운전은 늘 희정의 몫이었다. 그는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하는 동안 차에 질려 버렸다고 했다. 고속 주행 중에 차선 바꾸기를 주저하지 않는 등 꽤나 거칠게 운전하는 희정의 운전 습관을 보고는 “군대에선 그렇게 운전하다간 큰일 난다”라며 기겁하기도 했다.

 

“회사 앞에서 만나자고 하려고 가는 길에 전화를 했는데 바쁜지 두세 번 걸 때마다 통화 중이더라. 그 사람은 내가 비행 나갔을 때는 준호 챙기느라 저녁 약속이나 야근 안 하고 일찍 집에 왔으니, 도착해서 다시 연락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거의 다 왔을 때였어. 저 앞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준호 아빠 회사가 나오는데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어. 마침 바로 앞에 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하다는 표지판이 보였어. 신호 기다리느니 조금 돌아가는 게 더 빠르겠다 싶어서 왼쪽의 좁은 길로 들어갔는데 작은 카페들이 모여있는 곳이더라. 거기서 본 거야. 그 사람이 어떤 여자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걸.

 

거리는 한적했다.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곳이어서 속도를 줄였다. 연인처럼 손을 잡은 한 쌍의 남녀가 운전석 쪽 몇 미터 앞에서 희정과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남자는 뒷모습만 보였으나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정리 안 된 붕 뜬 곱슬머리, 이제 그만 버리고 새 옷 사서 입으라고 몇 번이나 잔소리했던 군데군데 헤진 체크무늬 남방과 헐렁한 청바지. 남편이었다.

옆에 붙어서 웃으며 대화 중인 여자는 작은 키에도 그와 눈을 마주하느라 고개를 한껏 위로 올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때 희정의 머릿속을 가장 먼저 채운 건 남편의 이상형이 저런 여자였나라는 어리둥절함이었다. 백육십 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했지만 꽤 글래머러스한 몸매였다. 몸의 볼륨을 드러내는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을지 몰랐다. 옆모습으로 보이는 얼굴에선 성형한 티가 드러났다. 손을 본 게 분명한 짙게 쌍꺼풀진 큰 눈과 동양인치고는 너무 곧게 세워진 코. 성형 수술이 흔한 승무원 사이에서 최근에 시술을 받은 후배들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사람을 잘 못 본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어. 그 사람이 확실했으니까. 그런데 표정은 낯설더라. 그 여자에게 보이고 있던 그런 표정을 난 본 적 없었거든. 뭐랄까. 가끔 준호를 대할 때와 비슷했어. 작고 여린 대상, 자신이 보듬어 주어야만 하는, 늘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어린아이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보호자 같은 표정이었어. 내게는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다음 이야기는 경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상대는 같은 회사의 동료였다. 얼마 전 경력 입사했고 일 관계로 자주 마주치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여자는 이혼 경력이 있었다. 전 직장을 그만둔 것과 이혼한 이유가 그때도 유부남과 비슷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남편도 몰랐다고 했다. 다만 육체적인 관계는 없었다고 당당히 밝히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이 마당까지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라며 더 분노했던 건 경미였다.

 

희정은 이혼을 요구했고 남편은 순순히 응했다. 그게 외도했다는 사실보다 몇 배 더 큰 상처로 남았다.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는 애원도 없었다. 아이와 자신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 없는 듯한 그의 덤덤한 태도는 희정의 가슴에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한없이 커다란 동공을 만들었다. 위자료로 대신하겠다며 공동 명의로 되어 있던 아파트를 희정에게 넘기고 그는 집을 나갔다.

 

회사도 그만둘 예정이라고 했다. 하고 싶다던 소설가의 꿈을 다시 좇는 것일지도 몰랐다. 예술가는 누구나 조금씩 자기 파괴 본능이 있다던데, 그가 우리 가족을 부숴버린 건 그런 기질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 어떤 일을 하고 지내는지 희정은 묻지 않았다. 일 년에 몇 번, 준호의 생일이나 방학 때 아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에 찾아오면 잠깐 그의 얼굴을 보는 게 다였다.

 

“있잖아.

희정이 경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투명한 것이,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것이 어려 있었다. 경미는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북유럽의 겨울산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새파란 호수의 그윽한 표면이 기억났다.

“그때 비보호 좌회전을 하기 전까지는, 내 삶은 이대로 쭉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 작은 우여곡절은 생길지라도 그냥저냥 평범하면서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안전한 삶이 계속되리라 믿고 있었어.

희정은 맥주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손바닥에서 떨어지면 바로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듯이.

 

“그런데 아니더라. 보호받을 수 없는 영역이 웅크린 채 숨어서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잠깐만 시선을 놓치면 삶이란 너무나도 무력하게, 언제든 깨어질 수 있다는 걸 분명히 마주한 거야. 그 잔인한 진실을 그때 운전대를 왼쪽으로 꺾고 나서야 깨달아 버린 거지. 그날 이후 운전할 때 비보호 좌회전을 못하겠어. 들어간 그 공간에서 또 어떤 참혹한 것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너무 무서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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