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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라기보다는 소박한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내과나 이비인후과와 달리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아서 그랬는지 몰랐다. 피아노 선율의 재즈 음악이 흐르고 서양화와 사진 작품들이 곳곳에 보였다. 접수처에서 예약 시간과 이름을 말하자 지금 원장님은 진료 중이며, 10분 정도면 끝날 예정이니 잠시 앉아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적절한 수준의 친절함이 담긴 간호사의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스칸디나비아 풍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여있는 잡지를 뒤적이며 희정은 기다렸다.
삼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원장실 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안쪽으로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는 접수처로 가서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잠시 후 친절한 인상의 간호사가 희정을 원장실로 안내했다. 한쪽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곳이었다. 모니터가 있는 책상이 구석에 위치했고 중앙에는 모던한 디자인의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침대처럼 누울 수 있는 안락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났네요.”
흰 가운을 입은 주아 아빠가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희정과 마주 보고 앉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요. 기다리다 지쳤어요.”
준호를 위한 무료 상담인데 그가 부담을 가질까 싶어 희정은 오히려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땡벌. 땡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노래 부르듯 선율을 담아 말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희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자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 죄송합니다. 그 노래 있잖아요.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 방금 하신 말씀에 갑자기 이게 생각나서.”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상황과 부끄러워하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모습에 희정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준호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 나이 또래에 비해서는 감정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편이고, 장래에 대한 자기 생각이 뚜렷하더군요.”
“그런데 왜 점심 급식을 먹지 않는 걸까요? 그게 제일 걱정돼요.”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게 낫다고 본인이 선택한 듯합니다. 그만큼 밤에 잠을 더 잘 수 있으니까요. 준호는 음식 섭취를 통한 영양보다 충분한 수면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한 끼 정도는 걸러도 영양 밸런스에 문제 있을 성장기는 지났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준호가 키나 체격이 작은 편도 아니고요.”
“그래도 밥을 거르는 건…”
“걱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우선 아이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충분한 존중과 동의를 보여주시는 게 좋습니다. 그런 후에 엄마의 걱정을 이야기해 줄 때 더 잘 받아들이죠.”
존중과 동의. 사회생활에서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태도였다.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조금 더 느긋해진 마음으로 희정이 물었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던가요?”
“아, 오히려 저에 대해 준호에게 이야기해 준 시간이 많았습니다. 진지하게 물어보더군요. 정신과 의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장래 희망이라면서요.”
“정신과 의사요?”
“네.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부터 마음먹었다고 하더군요. 정확히는 엄마 아빠 사이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을 때부터요.”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면서 희정은 준호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것들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커버린 아이에 대한 놀라움과 안쓰러움, 미안함과 함께 기특함이 가슴속에서 뒤섞여 맴돌았다.
“그때 자기는 잘 몰랐지만 아빠가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엄마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이나 가슴 아팠다고 하더군요. 사이좋던 부모님이 한순간에 서로 멀어지는 걸 보면서 자기도 힘들었고요. 그러면서 사람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면 엄마의 마음이 다시 좋아질 수 있을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그 생각뿐이었대요. 그러다가 정신과 의사가 되면 내가 엄마를 도와줄 수 있겠지. 아이로선 대견한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듯합니다.”
주아 아빠의 말이 계속되었지만 희정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남들은 자식 의사 시키고 싶어서 유치원 때부터 입시반 학원을 보낸다던데. 내 아이는 자기가 알아서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밥을 걸러가면서 공부를 한다. 하지만 이유가 가슴 아팠다. 엄마가 불쌍해서. 엄마를 도와주고 싶어서.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작은 꼬마가.
“요즘 아이답지 않게 속이 깊어요. 준호가 그러더군요. 엄마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자기만 신나게 지낼 수 없었다고요. 그래서 언제부턴가 말을 줄이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지냈는데 어느새 자기 성격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다고요. 그런 자기를 친구들이나 엄마가 대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가끔은 움츠러들게 된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준호의 그런 마음을 보듬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주아 아빠의 이 말로 상담은 마무리되었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못 한 사이에 희정의 뺨 위로 눈물 몇 방울이 흘러내렸다.
집으로 돌아온 희정은 아들의 방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책상에서 숙제를 하던 준호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고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런 엄마의 품 안에서 아들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엄마의 숨소리만으로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 들려온다는 듯이.
프라하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은 전반적으로 수월했다. 좌석 절반만 채워졌을 뿐이라 서비스의 부담이 덜했고 까다로운 기내식을 요구하거나 건강상의 문제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승객도 없었다. 도착 시간이 다가오면서 희정이 기내를 둘러보고 있을 때 한 좌석에서 승무원을 호출했다. 이륙할 때부터 안대로 얼굴을 가린 채 계속 자고 있던 승객이었다. 장거리 비행 중 서비스를 하나도 못 받고 내리는 경우는 불만 접수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사무장인 희정이 직접 좌석으로 갔다. 기내 조명이 모두 꺼져 있어 흐릿하게 얼굴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주무시느라 식사 서비스를 못 해 드렸네요. 간단한 스낵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라고 희정이 말할 때였다.
“여기서 이렇게 또 뵙네요.”
남자가 말하고 개인 좌석 등을 켰다. 주아 아빠가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희정을 바라봤다.
“프라하에서 학회가 있어 다녀오는 길입니다. 낮에는 세미나 참석하고, 저녁에는 한국어로 논문 번역하느라 잠을 못 자서 비행기 타자마자 기절했네요.”
희정이 가져다 중 컵라면을 받으며 주아 아빠가 말했다.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요즘 준호는 어떻냐고 그가 물었고 희정은 덕분에 요즘 많이 밝아졌다고 말했다.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회사 규정 상 승객과의 사적인 대화는 금지되어 있다. 희정은 또 필요한 것 있으면 호출해 달라는 말과 함께 가볍게 인사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입을 떼려다 만 듯한 그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비행을 함께 한 승무원들과 간단히 인사를 마친 후 희정은 테이저 건을 반납하기 위해 공항 4층의 항공사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주아 아빠가 다가왔다. 아까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다며 머뭇거리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서둘러 입국 게이트 밖으로 나와 희정을 기다렸음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이렇게 같은 비행기에 탔던 승무원에게 접근하는 남자 승객들이 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첫눈에 반했습니다. 희정은 한 번도 응한 적 없었다.
“괜찮으시면 일 마치고 차라도 한잔하실 수 있을까 해서요. 준호 상담 관련된 내용으로 뵙자는 건 아니고,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게 아쉬워서…”
병원에서 만났던 명쾌한 전문가는 여기 없었다. 사춘기 소년처럼 우물쭈물하는 그의 모습에 희정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좋다며, 그렇지만 유니폼을 입은 채 공항에서는 좀 그러니 각자 집에 가서 짐을 정리한 후에 동네에서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녀의 승낙에 주아 아빠는 활짝 웃었고 둘은 연락처를 교환한 후 헤어졌다.
밖에서 만나 차를 마시는 건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걸 의미한다. 차를 마신 후 식사를 함께 하고, 어쩌면 술자리로 이어질지 모른다. 그가 희정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남녀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고 해도 두 사람 모두 혼자이니 잘못된 관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 한 발자국을 떼는 것이 희정은 여전히 두려웠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불확실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건 준호 아빠와의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비보호 좌회전했을 때 마주했던 하염없이 어두운 자신의 모습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다짐해 왔다.
올림픽대로에서 빠져나와 집 근처에 왔을 때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앞 교차로에서 사고가 난 듯 가까운 곳에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희정의 차는 준호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다니던 수영 학원 앞 차도에 멈춰 있었다. 수영을 마치고 나올 때면 딸기맛 어린이 음료를 사달라던 편의점도 그대로였다.
“난 엄마가 더 많이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렇게 되도록 내가 이제 엄마를 도울 거야. 더 이상 과거 일로 나한테 미안해하면서 자기를 괴롭히지 않아도 돼. 그러기에 충분한, 좋은 엄마이니까.”
병원에서 돌아와 조용히 눈물 흘리며 준호를 꼭 안고 있던 희정에게 준호는 이렇게 말한 후 부끄럽다면서 몸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정작 더 부끄러웠던 건 희정이었다. 이제 아이가 나를 걱정해 주고 있네.
“언니는 조금 더 단단해져야 돼. 날 봐. 나라고 상처받는 일이 없겠어? 학원 일이란 게 완전 을로 사는 거거든. 그래도 난 그런 일들이 날 더 단단하게 만든다고 받아들여.”
희정이 지친 모습을 보일 때면 평소보다 더 기운찬 목소리로 경미는 잔소리 같기도 하고 응원 같기도 한 말을 해줬다. 단단해지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과의 일 때문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내가 나인 채 살아가는 거. 두려워하기 전에 한 번 해보고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는 거. 그게 단단해지는 거야.”
반대편 차도는 저 앞에서 난 사고 때문인지 오는 차가 한 대도 없이 비어 있었다. 비보호 좌회전 표시와 왼쪽으로 빠지는 길이 보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일단 가볼까.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은 그대로 마주해보자. 희정은 좌우를 간단히 살핀 후 운전대를 돌리며 악셀 위에 놓인 발에 힘을 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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