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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은 카스텔라와 우유를 조금 목으로 넘긴 후 감기약을 먹고는 다시 잠에 빠졌다. 눈을 감고 있는 그에게 “저녁에 먹을 것 좀 사가지고 다시 올게요”라는 말을 건네고 고물상에서 나왔다.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점심시간이었지만 밥 생각이 없어 그냥 열람실로 들어갔다. 모두 식당으로 갔는지 좌석은 비어 있었고 현아도 없었다. 자리에 앉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몸이 물에 젖은 수건처럼 무거웠다.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륵 감기려 할 때 현아가 돌아왔다.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요? 전화하려 해도 연락처도 모르고.”
걱정과 짜증이 절반씩 섞여있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셋 모두 서로의 연락처를 모르는 사이였구나.
“혹시 할아버지 보고 온 거예요? 어디 사시는지 알고 있어요? 어떠세요? 많이 편찮으세요?”
“하나씩, 하나씩만. 감기 걸리셨어요. 약 사서 드시는 거 보고 왔고, 괜찮아지겠죠 뭐.”
저녁에 다시 가보려 한다는 말에 그녀는 자기도 꼭 같이 가겠다고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이번에도 혼자 사라지면 가만 안 두겠다면서.
폐관 안내 방송이 나오자 열람실의 노인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아도 옆에 쌓여있는 신문을 차곡차곡 모았다. 이상했다. 이건 영감님이 하던 행동인데. 내 시선을 눈치챈 현아가 이쪽으로 와보라면서 손짓으로 날 불렀다. 책상을 돌아가서 그녀 옆에 서자 아직 정리하지 않은 신문의 한쪽 면을 가리키면서 내게 속삭였다.
“여기 좀 봐요.”
사회면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개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5중 추돌 사고가 났다. 전자 발찌를 차고 출소한 성범죄자가 신고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이런 내용의 손바닥 크기만 한 짧은 기사들이 보일 뿐이었다. “뭐가요?”라고 묻자 현아가 답답했는지 검지를 지면에 직접 대어 가리켰다.
교통사고 기사의 끝부분이 오려서 붙인 종이로 덧대어 있었다. 마지막 문장 두 개가 가지런히 붙어 있는 서로 다른 단어들로 구성되어 만들어졌다. ‘나들이를 가던’까지는 신문에 인쇄되어 있는 내용이었지만, 그 뒤는 종이 조각으로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가족이] + [탄] + [승용차의] + [앞] + [부분은] + [크게] + [파손] + [되었다]. [하지만] + [다행히] + [크게] + [다친] + [사람은] + [없었다].
굉장히 정교하게 덧붙여 있어 언뜻 봐서는 누군가 일부러 손을 본 것이라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감님이 취미 삼아 한다는 신문 스크랩이 이걸 말하는 거였나.
“지난 며칠 사설을 못 봐서 예전 신문을 가져왔어요. 이 날 거에 할아버지가 종일 사회면을 펼쳐놓고 작업하시는 걸 봤거든요. 어떤 걸까 궁금해서 살펴보니 이게 나왔어요.”
현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까지 열심이신 걸까요?”
“글쎄요. 본인은 그다지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인데. 이거 몰래 봤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
“너무 궁금한데. 뭐 알았어요. 누구에게나 작은 비밀은 있는 거니까.”
그녀는 마음에 안 드는 듯 눈썹 사이를 살짝 찡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만두와 순대를 샀다. 환자가 먹을 건데 그게 뭐냐며 현아는 스마트폰을 꺼내 배달 앱으로 뭔가를 주문했다. 쪽문을 열고 들어가 몇 걸음 떼었을 때 현아가 고물상 주변을 둘러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서 사람이 산다고요? 그냥 넝마 모아놓는 데 아니에요?”
“엄연한 사업체예요. 영감님이 사장님이자 집주인이기도 하죠.
이번이 여길 온 게 처음이고 영감님이 살아온 이야기도 모르니 놀랄 만도 했다. 시간 내서 한 번 여쭤보라고 현아에게 말한 후 가운데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사연을 내가 말해주는 건 실례가 될 일이었다.
영감님은 침대에 없었다. 보풀이 군데군데 일어난 털 조끼를 어깨에 걸치고 목에 수건을 두르고는 난로 앞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불을 쬐고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 조명이 약해 난로에서 이글거리는 불빛이 얼굴의 주름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 주무세요?”
현아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다. 가끔 입에서 나오는 푸우, 하는 숨소리가 괜찮다는 답처럼 들려 안심이 됐다. 구석에 있던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우리도 난로를 둘러싸고 앉았다. 그가 잠에서 깰까 조용히 있던 중에 현아의 전화기가 울리더니 철문 밖에서 오토바이 엔진음이 들렸다. “왔나 보다”라며 현아가 일어났다. 그 소리에 영감님이 고개를 들며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면서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안 와도 되는데 말이야. 게다가 시험 얼마 안 남은 사람까지 데리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가에 한껏 주름이 접혀 있었다. 침대 옆에 놓인 빈 테이블이 보였다. 그걸 들어서 난로 옆으로 가져오며 말했다.
“시장하시죠? 배달 시킨 음식이 왔나 봐요. 저도 영감님 드실 것 좀 사 왔어요.”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저 왔어요. 그리고 짠! 전복죽이에요. 이거 드시고 기운 차리세요.”
현아가 묵직한 비닐봉지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영감님은 “배가 고파지는 게, 벌써 다 나은 것 같다”라며 껄껄 웃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저 그거 봤어요. 도서관에서 손보신 신문.”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현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 말라는 눈길을 던졌으나 그녀는 나를 설득하려는 듯한 말을 영감님에게 건넸다.
“모른 척 그냥 넘어가려다가 너무 궁금해서요. 이거 계속 신경 쓰여서 저 공부 못하면 안되잖아요. 그쵸?”
“신문? 거기서 뭘 봤는데?”
그는 짐짓 모른 척하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교통사고 기사요.”
“그 기사가 어쨌길래?”
“에이. 장난치지 마시고요. 마지막 부분을 아주 정교하게 바꾸셨잖아요.”
“그게 무슨 대수로운 일도 아니고. 이제 그만해요.”
내가 팔을 내저으며 현아의 말을 막으려고 할 때였다. 영감님이 오히려 괜찮다는 표정으로 내 팔을 가만히 잡고는 말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텐데. 괜찮으려나.”
가족을 잃고 이 고물상에서 살게 된 이야기를 그는 다시 한번 꺼냈다. 현아의 얼굴에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지 오래였다. 두루마리 휴지를 끊어서 계속 주다 보니 휴지 롤이 홀쭉해졌다.
“여기서 살다 보니 온갖 신문이 아침이면 다발 째로 들어오니까 좋더군. 정치면이나 경제면은 그냥 읽어 나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이는 건 단문 기사들로 채워진 사회면이었지. 어떤 사고가 났다. 모모 씨가 그 사고에서 어떤 변을 당했다. 별 내용 없는 기사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네. 단조롭고 건조한 문장 몇 줄만으로 그 사람의 일이 정리되어 있더군. 내 가족에게 닥쳤던 것도 그렇게 쓰였겠지. 육하원칙이라고 하나.”
“어떤 일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왜, 어떻게 일어났다.”
현아가 코멩멩한 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니 남겨진 나는 어땠을지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지. 기사로 쓰이기는 했을까, 어떤 내용일까 궁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그렇다고 그날 신문을 찾아볼 염두까지는 안 나더구먼. 우리 도서관에서도 그때 신문을 검색할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해 것들이 꽂혀있는 근처에도 가지도 못하고 있네.”
그는 일어나 책장 쪽으로 가서는 커다란 파일 책 한 권을 꺼냈다. 테이블 위의 음식을 대충 치우고 올려놓은 뒤 그걸 펼치자 한 장씩 정리해 놓은 신문 용지가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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