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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주말이 지난 후 도서관은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정기 간행물 열람실에 등장했다. 노인들은 내색은 안 했지만 자신들만의 공간에 침범한 낯선 존재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하긴 내가 처음 여기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요한 호수 표면에 던져진 돌멩이가 된 듯한 기분에 처음 며칠은 영 불편했었다. 하지만 이 젊은 여자에게서 그런 어색해 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생 정도 됐을까. 대충 묶어 뒤로 내린 긴 검은 머리에 두꺼운 검은 뿔테안경이 화장기 없는 얼굴을 더 하얗게 보이게 했다.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녹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이후로도 늘 같은 차림이었다. 티셔츠 색상은 가끔 변했는데 바지는 항상 회색이었다. 얼굴은 예쁘장한 편이지만 꾸미고 다니는 데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건 이 여자가 지금도 내 앞 맞은편에 앉아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묵직해 보이는 검은색 가방을 등에 메고 열람실로 들어와 한 번 둘러보고는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구석부터 책상을 하나씩 살펴보더니 나와 영감님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영감님이 신문을 쌓아놓는 그의 왼쪽 자리이자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저기, 이것 좀 치워 주시겠어요?

펼쳐진 신문에 코를 박아 넣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던 영감님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주섬주섬 신문을 정리해 자기 앞쪽으로 밀어 놓았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정사각형 책상에 어차피 우리 둘만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기에 한 명 더 앉는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자리였을까. 그녀는 나중에 “그나마 젊은 사람이 한 명 보여서요”라며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가방에서 꺼낸 건 스프링이 끼워진 형태로 분철된 수험서처럼 보이는 여러 권의 책과 노트, 그리고 두툼하게 채워진 천 재질의 필통이었다. 자리를 정돈하고 바로 책을 펼쳤다. 몇 번이고 봤던 듯 여기저기에 형광펜으로 표기해 놓은 부분과 검은색 손글씨로 메모해 놓은 주석이 보였다. 그녀의 모습을 나뿐만 아니라 영감님도 힐끗힐끗 훔쳐보고 있었다. 때로 둘의 눈이 마주쳐 민망한 표정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우리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작게 움직여 소리 나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리며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다.

 

노인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3층 식당이 여유 있을 시간이 되었다. 영감님과 나도 의자에서  일어날 때 한껏 기지개를 켜던 그녀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밥 먹으러 가시게요? 그럼 저도 껴 주세요.

 

그녀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다가 식판 위에 음식을 담을 때 “와. 대박. 이 가성비 실화예요?”라며 감탄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우리와 같은 테이블에 앉더니 묻기도 전에 자기를 소개했다.

“이현아입니다. 대학 졸업한 지 이 년 됐고요. 취준생입니다. 이 동네 살아요.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바로 숟가락을 들어 밥을 양껏 퍼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의 모습에 영감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별말 없이 식사를 마친 후 영감님이 현아를 보고 말했다.

“이렇게 먼저 인사를 해줬으니, 보답이 있어야지. 커피 한 잔 어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그녀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늘 그랬듯 자판기 쪽으로 가려나 싶었는데 “이 근처에 잘 아는 커피집 있어요?”라고 영감님이 현아에게 물었다. 이제껏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온 동네 꼬마 아이를 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 공부는 잘되어가요?

“열심히 하는 거죠 뭐. 이제 시험 두 달 남았으니 조금만 힘 내면 돼요.

카페에 들어와서 영감님과 현아 둘만의 대화가 계속되었다. 나도 끼어들어야겠다 싶어 말을 걸었다.

“공부하는 책이 꽤 낡았던 데. 공무원 수험서인가요?

“아니요. 상식책이에요. 박문각이라고.

“박문각?

“저 언론사 준비하거든요. 시사 상식 시험이 있는데, 준비하는 애들은 거의 이 책으로 공부해요. 박문각이라는 출판사가 만들어서 그 이름으로 불러요. 전 신문 기자 되고 싶거든요.

“호오, 신문 기자.

영감님 얼굴에 반가운 빛이 올라왔다.

“그런데 왜 여기서 공부하려고 해요?

“학교에 언론 고시 준비 전용 학습실이 있어요. 거기서 공부하다가 요즘 들어 눈치 보이더라고요. 졸업한 지 한참 지난 내가 후배들 자리 뺏는 것 같고. 같이 공부하던 동기들은 벌써 붙었거나, 아니면 졸업하면서 진로 바꾼 다음에 다른 데 취업했거든요. 쓸쓸하기도 해서. 그래서 자리를 뺐어요.

“수험 공부하는 사람들은 거의 위에 다른 열람실에서 하던데. 일층은 노인들 밖에 없고 조금 어수선하지 않아요?

“가 봤는데 자리가 별로 없더라고요. 여기가 제일 한적해 보여서요. 그리고 기사 작성 시험 준비 때문에 신문도 자주 봐야 하니까 편하기도 하고.

현아는 별 특별한 이유는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그날부터 셋이 함께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난 신문이나 잡지를 뒤적이다가 가끔 졸기도 하고 창밖을 멍하니 쳐다봤고 영감님은 신문에 종이를 붙이는 비밀스러운 작업에 열중했다. 현아는 막바지 공부에 박차를 가하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하루를 채워갔다.

우리의 공통분모가 되어준 건 점심시간이었다. 밥 먹을 때는 말이 없었지만 커피 마실 때는 그렇지 않았다. 식사 후 도서관 근처 카페에 들리는 것이 셋의 습관이 되었다. 커피값은 늘 영감님이 냈는데 가끔은 내가 계산하겠다고 해도 이 정도는 인생 후배들을 위해 쓰는 법이라며 마다했다. 열 잔 마시면 한 잔을 무료로 주는 쿠폰에 도장이 다 찍히면 그걸 현아에게 슬쩍 건넸다. 심심할 때 혼자 마시러 오라면서.

 

“그런데 할아버지, 가끔 신문 오려 놓은 것 같은 종이 조각이 보이던데, 그거 도서관 신문으로 하시면 안 돼요.

현아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작은 목소리로 영감님에게 말했다. 수험서만 들여다보는 줄 알았더니 어느 틈에 그의 비밀스러운 작업을 눈치챈 걸까. 그녀의 말에 영감님이 마시던 커피가 목에 걸린 듯 기침을 몇 번 뱉어냈다.

“그거 도서관 것 아니야. 집에서도 신문 구독하거든. 그걸 스크랩한 거야.

“그럼 괜찮고요. 그런데 왜 도서관에 와서도 신문을 또 보세요?

“하나만 받아보니까. 도서관에서는 다른 신문들도 많잖아. 각자 내용을 비교하는 것도 재밌지.

“맞아요. 저도 사설은 다 꼼꼼히 보거든요. 정말 논조가 조금씩 다 다르긴 하죠.

“그런데 영감님이야 그렇다 쳐도. 현아 씨는 특이하네요. 요즘 다들 인터넷으로 신문 보지 않아요? 굳이 귀찮게 종이로…”

영감님과 현아가 거의 동시에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 신문은 종이로 읽어야 된다고.

 

초겨울 비가 이틀째 계속 내렸다. 첫눈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비 때문인지 더 춥게 느껴졌다. 늘 영감님이 않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곳을 드나들기 시작한 이후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제 마른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몸이 안 좋아진 걸까. 현아도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 있어요?”라며 걱정하는 눈치였다. 연락을 하려 해도 전화번호라던가 카톡 아이디도 알지 못했다. 그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현아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도서관에서 나와 우산을 펴고 영감님 집 쪽으로 향했다.

 

약국에 들러 몸살 감기약과 쌍화탕을 사가지고 오길 잘했다. 영감님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부엌으로 쓰는 작은 건물에 들어간 적이 있지만 여기는 처음이었다. 옆으로 길게 늘린 직사각형 건물의 왼쪽에는 자르다 만 듯한 신문 용지가 가득 쌓인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책장들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빈칸 없이 책이며 파일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출입문 앞 중앙에 석유난로가 있었으나 한동안 켠 적 없는 듯 먼지가 그 위에 뽀얗게 내려앉았다. 옷걸이와 신발장을 지나 오른쪽 구석에 철제 프레임으로 된 침대가 있었다. 멀티탭에서 이어진 전기선이 침대 위에 깔린 전기장판으로 이어졌다. 영감님은 장판과 두꺼운 이불 사이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영감님, 괜찮으세요?

그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건네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열이 꽤 있었고 목에 가래가 섞인 듯 끙끙대며 앓는 소리가 탁했다. 그의 어깨를 조금 흔들며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제 목소리 들리세요? 몸이 안 좋으신 거 같아서 약을 좀 사 왔어요. 이거 드시고 주무세요.

그제야 영감님이 실눈을 뜨고 날 알아보고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여길 왜 온 거야. 난 괜찮아.

“아직 빈속이시죠? 잠깐만 계세요. 나가서 우유라도 사 올게요.

나는 동네 슈퍼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왼쪽 다리만 아니었으면 뛰었을 텐데, 불편한 몸이 처음으로 싫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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