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날 사랑하지 말아요 너무 늦은 얘기잖아요]
한국 겨울이 이렇게나 추웠나. 수진은 매서운 바람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홍콩에서 들어온 지 2주 째가 되었지만 외출할 때마다 옷을 더 두껍게 입고 나올 걸 하고 매번 후회했다. 오늘은 항공 승무원으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을 코엑스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홍콩에서 지낼 때 셋이 자주 어울렸었는데 두 명은 코로나 여파로 인한 회사 긴축 경영 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항공 업계가 위축되기는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국내 항공사로의 이직은 어려웠다고 했다. 영어와 중국어가 유창했던 사람은 학원 강사로 일하고, 다른 한 명은 결혼하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수진이 캐세이퍼시픽 항공에 승무원으로 취업해서 홍콩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향수병은 없었다. 한국인 직원들은 휴가 때면 귀국길에 올랐지만 수진은 고향 대신 가보지 않은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가끔 한국행 스케줄이 나올 때도 부모님 집에서 자는 대신 회사에서 내어준 호텔에 머물렀다. 집에 들러 식사만 마친 후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딸의 뒷모습을 이제 노년으로 접어든 부모님은 그저 웃는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해 겨울, 아이를 가져 불러오는 배로 집을 나온 그녀는 영호와 부산으로 떠났다. 9개월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남자도 아이도 없었다. 부모님은 딸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엄마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흐느꼈고 아빠는 줄담배만 피워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신실하던 아빠가 성당에 발을 끊었다는 걸 알았다.
4학년 1학기를 통째로 날려 버렸지만 마지막 학기 수업을 꽉 채우고 계절학기까지 해서 제때 졸업할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활해 보려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돌아온 공간에서 사람들과 마주할 때면 감지되는 그들의 어색한 눈빛과 말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몸이 아파서 학교를 쉬는 줄 알았지, 그녀의 속 사정을 모르는 전공 교수님은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지만 수진이 간절히 원했던 건 누구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는 새로운 곳에서의 삶이었다.
홍콩 침사추이에 있는 작은방에서의 생활과 비행 중 홀로 묵는 호텔에서 늘 수진은 고독했으나 한편으로 안전하다고 느꼈다. 업무 중에는 활달하고 동료들과 잘 섞이는 편이어서 매년 평가는 좋았지만 거기까지였다. 친절하지만 사람 사이에 지키는 선이 분명한 사람이라는 평을 얻은 그녀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거나 심적으로 기대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수진은 자기 생각을 내놓지는 않았다. 누구도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아무도 들여놓지 않을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이번에 만난 옛 동료들은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말은 안 했지만 수진이 독신주의자인 줄 알았다고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홍콩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에도 수진이 누군가와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만난 거야?”
“그러게. 수진 씨는 왠지 평범한 사람은 안 만날 것 같은데.”
“한국 사람이야?”
오랜만에 만나니 홍콩 생각난다며 쇼핑몰에 있는 딤섬 전문점에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후 디저트가 나오기 전에 수진이 건넨 청첩장을 받은 옛 동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질문을 쏟아냈다.
“내가 그렇게 별난 사람이었나?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게 뭐 그렇게 별난 일이라고.”
수진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들의 호들갑에 악의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타국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냈던 동료애에서 나오는 호의 섞인 관심일 뿐이었다. 고마운 반응이지만 자신의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내비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네덜란드 사람이야. 여행하다가 만났어.”
3년 전 수진은 연말과 새해 첫날을 더한 2주간의 휴가를 받아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여행 중이었다. 늘 그랬듯 혼자 떠난 일정이었다. 평소에는 특별한 계획 없이 호텔만 예약해 놓은 뒤 그날 아침의 기분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움직였지만 이번 1월 1일만큼은 할 일이 있었다. 빈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에 갈 예정이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슈만이나 말러의 곡을 포함해 즐겨듣는 고전 음악 작곡가는 몇 있었다. 매년 정초가 되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와 폴카를 주요 레퍼토리로 하는, 특히 마지막 앵콜곡인 라데츠키 행진곡이 연주될 때면 관객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는 것으로 유명한 이 음악회의 유명세는 수진도 알고 있었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이 입장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수진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로 음악회 티켓을 받았는데, 런던에서 홍콩으로 가는 항공편의 일등석 담당으로 근무하던 중의 일이었다. 이 노선에는 영국 국적을 지닌 홍콩인 부호들이 자주 타는 편이고 승무원은 소수의 VIP에게 장거리 비행 내내 밀착 서비스를 제공한다.
출발지인 런던 히스로 공항에는 가을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옷을 두껍게 입은 노년의 동양인 여자 승객은 좌석에 앉으면서부터 간간이 마른 기침을 하더니 비행기가 동유럽 근처를 지나고 있을 때 목에 사레가 걸린 듯 거친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수진은 응급 처치를 시작했다. 목 주변의 상의 단추를 풀러 호흡을 편하게 하고 젖은 수건을 입에 대어 수분을 흡입할 수 있게 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는 걸 눈치채고는 상단 수납함을 열어 그녀의 핸드백에서 호흡 안정기를 찾을 수 있었다. 수진의 도움으로 그걸 입에 물고 깊은숨을 몇 번 들이쉬고 나서야 승객은 안정을 찾았다. 천식을 앓고 있던 그녀는 감기 기운이 있던 중에 비행에 따른 기압 차이로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을 겪은 것이었다.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한 노부인은 비행기가 홍콩에 도착할 때까지 수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무일푼에서 시작해 성공하기까지의 사연과, 마흔이 거의 다 되어서야 홍콩 지사로 발령받은 영국인 남편을 만난 것, 그리고 둘 사이에 자식이 없어 적적하다는 푸념과 함께 젊어서 고생한 때문인지 지금은 천식까지 해서 몸에 성한 곳이 없고, 지금 이 재산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까지.
그녀는 답례를 하고 싶다는 뜻을 비췄으나 수진은 승객을 보호해야 할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며 에둘러 거절했다. 홍콩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노부인은 수진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조촐한 연주회 티켓일 뿐이라고, 나는 별로 관심이 없으니 받아달라며 억센 손아귀로 수진의 손에 쥐여준 것이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의 1인용 티켓이었다.
아직 연말 휴가를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은 수진은 이참에 오스트리아와 함께 인접한 체코로 결정했다. 빈과 프라하 시내에 호텔만 잡고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현지 플리마켓을 거니는 등 중부 유럽인의 느리고 조용한 삶에 녹아들어 지내다가 1월 1일 오전에 연주회장인 빈 무지크페라인을 찾았다.
격식을 갖춘 드레스까지는 아니지만 준비해 간 검은색 스커트 정장을 입고 입장했다. 노부인이 준 티켓의 좌석은 정 중앙의 시야가 좋은 곳에 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의 호의에 감사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앉아 있을 때 왼쪽에서 거센 영어 발음으로 실례한다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진이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게 공간을 만들어주자 그는 바로 옆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껏 숨을 들이켠 후에 긴 한숨을 뱉어냈다. 눈을 감은 채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거세게 두 번 치고 나서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진의 시선을 눈치챘다.
“너무 가슴이 뛰어서요. 정말 어렵게 구했거든요. 이 음악회 티켓.”
수진은 사실 그가 뺨을 때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놀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동양인 여자의 그 눈빛을 앞으로도 잊지 못했다. 수진을 음악회에 매년 오는 사람인 줄 알았고, 때문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녀가 자신을 촌뜨기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고 고백했다.
(계속)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5화) (1) | 2024.01.24 |
---|---|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4화) (1) | 2024.01.23 |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2화) (0) | 2024.01.20 |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1화) (1) | 2024.01.19 |
액땜 (1) | 2024.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