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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요. 의미를 잃어버린 그 표정]
버스는 압구정동을 지나 동호대교를 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물고기 떼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는 것처럼 반짝이는 햇살이 한강 수면 위에 비쳐 부서지고 있었다. 그 해 가을, 영훈이 성당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들과 강촌으로 수련회를 갔던 날에도 같은 풍경을 봤다. 열차에서 내린 그의 앞에 펼쳐진 북한강이 지금처럼 햇빛을 한껏 비추며 눈을 간지럽혔다.
신학생 시절, 대학 생활을 하는 친구들에게 대성리며 강촌에 MT를 다녀온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영호에게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한 데 모여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이른 아침, 짝사랑하던 여자 선배와 단둘이 보트를 타면서 사귀게 되었다는 자랑 섞인 고백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어젯밤 영호는 마치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놀러 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설렜다. 풋풋한 이야기가 곳곳에 녹아 있는 청춘의 성지를 방문하는 기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을 때도 이렇게까지 두근거리지는 않았는데. 지금의 기대감이 불경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가을 한복판의 날 좋은 연휴라 통일호 열차에서 한꺼번에 내린 인파로 강촌역 플랫폼은 떠들썩하게 붐비고 있었다. 햇살을 반사하는 수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우두커니 서 있는 영호의 등을 “신부님, 어서 가요”라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가볍게 밀었다. 초등학교 3, 4학년 주일학교 교사를 맡고 있는 안수진 미카엘라였다. “바오로 신부님은 강촌 처음 와 보신대”라며 다른 봉사자들도 웃으며 그의 팔을 끌었다. “제가 촌스러워서 미안해요”라며 영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주일 학교 운영을 함께 하며 동생처럼 여기는 친구들이었다. 영훈은 몇 달 동안 모아놓은 사제 급여를 본당에서 나온 수련회 예산에 더하라며 총무를 맡은 녀석에게 슬며시 건넸고, 청량리역에 가기 전에 다 같이 마트에 들러 고기며 술을 넉넉하게 사 왔다. 남자용과 여자용의 큰 방 2개로 구성된 숙소에 짐을 풀 난 후 영호까지 해서 열 명의 젊은이가 숙소 앞 넓은 마당의 커다란 평상에 둘러앉았다.
“안전하고 즐거운 수련회가 되도록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제복 대신 흰색의 긴팔 라운드 티와 청바지를 입은 영호가 성호를 긋자 일행은 두 손을 한데 모으고 눈을 감았다. 삼종 기도까지 마친 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함께 박수를 쳤다.
“이제 뭐 할까요?”
“아직 대낮인데 바로 고기 굽기도 좀 그렇다.”
“게임 같은 거 할까?”
모두의 눈망울이 반짝이고 있을 때 영호가 입을 열었다.
“근처에 강촌 성당이 있어요. 저보다 몇 살 많은 선배 신부님이 계신데, 인사도 드릴 겸 구경 갈래요?”
“와. 신부님. 진심 너무 하신다. 저희 맨날 성당에서 보는 얼굴들인데 오늘만큼은 벗어나면 안 돼요?”
목소리가 크고 활발한 성격의 중학교 1학년 담당 경석이 얼굴을 장난스럽게 찌푸리고는 볼멘소리를 하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졌다.
“저는 좋은 것 같아요. 자연 속에 있는 성당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수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한쪽 손을 들고는 말했다.
북한강을 따라 짧은 산택을 다녀와서도 시간이 남아 마당에서 5명씩 편을 갈라 피구를 했다. 재미 삼아 가볍게 한다는 게 지는 쪽이 설거지 담당을 하기로 내기를 걸자 다들 진지한 눈빛을 띠기 시작했다. 4번 먼저 이기는 조건에서 막판까지 가는 접전 끝에 영호가 속한 팀이 졌다. 상대팀의 수훈은 안수진 미카엘라였다. 공을 피하면서 상대방이 던진 공을 잡아채 공격권을 뺏어온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운동 신경이 이렇게 좋냐”면서 남자들이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주일학교에서는 늘 조용했고 아이들을 대하면서도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없었다. 갸름한 얼굴에 수수한 단발머리를 한 수진은 눈매가 다소 날카로운 탓에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늘 차분한 몸가짐이 뚜렷한 이목구비와 어울려 이지적인 매력을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말썽꾸러기가 많아 누구나 꺼려 하는 초등 3, 4학년 반을 두 해 연속 맡아오는 걸 보니 꽤나 강단 있는 성격일 수도 있겠다고 영훈은 생각했다. 피구에 집중할 때 표정은 사극 드라마에 나오는 표독스러운 황후 역의 여배우처럼 눈빛이 매서웠지만, 공격이 성공하고 활짝 웃을 때는 얼음 공주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해맑게 웃는 어린 소녀가 보였다.
한껏 땀을 흘린 후 붉은 노을이 빛을 투과하는 커튼처럼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 식사를 준비했다. 남자들이 화로에 번개탄과 숯불을 넣어 바비큐 채비를 하는 동안 여자들은 채소를 씻고 평상 위에 상을 차렸다. 영호도 뭔가 도우려 했으나 “신부님은 살림도 안 하시면서. 도움이 안 되니 쉬고 계세요”라는 우스갯소리 섞인 말만 들었다.
청춘의 왁자지껄함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한 줄기 그리움이 고운 한지 위에 떨어진 검은 먹물처럼 그의 가슴에서 번져 나갔다. 앞으로도 이런 풍경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 내가 선택한 삶의 길에서 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겠구나. 이 풍경에서 왜 그리운 마음이 드는 건지 영호는 알 수 없었다.
삼겹살에서 떨어진 고깃기름에 화로에서 가끔 거센 불꽃이 피어올랐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웃고 떠드는 가운에 사위가 어두워졌다. 하늘엔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란 구름 몇 개만 어두운 공간에 희미하게 떠 있고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반짝이는 별 무리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누군가 가져온 CD 플레이어에 소형 스피커를 연결해서 음악을 틀었다. 브라운 아이즈와 바이브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라고 노래하는 구슬픈 목소리가 울리자 “야, 청승맞게 뭐야. 좀 신나는 걸로 틀어 봐”라고 웃음 섞인 핀잔이 나왔다. 갈아 끼운 CD에서 거북이의 빙고가 힘찬 반주와 함께 시작되면서 모두 소리를 질렀고 몇몇은 두 팔을 위로 올리고 제자리에서 뛰기도 했다. 신나고 흥겨운 노래였지만 들어본 적 없는 영호는 조금 당황한 채 한데 어울려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후, 부산에 가서 둘이 살 때 영훈은 가끔 이날의 수진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뛰어다니던 그녀의 모습을 하나하나 묘사하면서, 그때가 처음으로 자신의 마음에 수진이란 사람이 들어왔던 때였다고 말했다. 불 꺼진 어둡고 좁은 방에서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수진은 불룩해진 배에 영훈의 손을 올리고는 “그렇게 표독스러운 여자와 이렇게 같이 있게 돼서 무섭단다, 아빠가. 우리 참 불쌍하다. 그렇지 아가야”라며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웃을 때면 두 줄의 가는 주름이 지어지는 수진의 눈꼬리를 영훈은 언제고 선명하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지금 버스 뒤편 좌석에 앉아 있는 저 여자도 웃을 때 그렇게 될까. 그날 이후 20년도 넘게 지난 지금, 그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 승객이 한 번 웃어주면 좋겠다고 영훈은 바랬다. 그럼 수진인지 아닌지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을 텐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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