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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스마트폰을 길바닥에 떨어뜨렸다. 내 잘못이었다. 지하철역으로 걷던 중에 폰을 들고 손가락으로 타이핑을 하느라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해 부딪히고 말았다.
씨발.
그 남자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닥에 나뒹군 전화기를 주울 생각도 못 하고 고개 숙여 사과했다. 쭈그려 앉아 폰을 집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화면 보호 필름에 오른쪽 위부터 두껍게 금이 그어진 것뿐 전화기는 다행히 멀쩡했다. 그제야 안심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동시에 방금 들은 욕지거리가 귀에 맴돌며 머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다 팀장 새끼 때문이야.
2주 동안 밤 10시 전에 퇴근한 날이 없었다. 주말엔 회사에 나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마음 놓고 쉬지는 못했는데 팀장은 주말이고 새벽 시간이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문득 떠오른 업무상 궁금한 점이나 자기 생각이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이것 좀 알아봐 줘요’, ‘어떻게 생각해?’ 식으로 메시지가 날라왔고 답장은 필수였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10분 정도까지 답을 안 하면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쌓여온 피곤이 이젠 못 하겠다며 투정을 부린 걸까. 5분 간격으로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도 아침에 눈을 뜨지 못했다. 서두르면 지각은 피할 수 있었다. 부리나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야 혹시 밤사이 메시지 온 게 있나 확인할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마트폰 화면 위젯에 팀장의 이름과 문자의 앞 부분이 보였다. 내용은 별것 아니었다. 얼른 답해 버리려는 생각으로 고개를 숙인 채 걷다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내게 욕을 한 남자보다 팀장이 더 미웠다. 전철을 타고나서도 그를 향한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40대 중반 남자치고는 관리를 잘 한 듯 날렵한 몸매를 지녔고, 과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옷맵시에 적당히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말하는 세련된 매너까지. 대기업 계열사에서 오래 있던 사람이 왜 우리 회사처럼 작은 곳으로 왔는지 이해되진 않았지만 나를 포함한 팀원 모두는 첫인사를 하는 그를 기대에 찬 눈길로 바라봤다.
기대가 깨지기까지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똑똑한 일벌레였다. 그 점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의 기준을 팀원 모두에게 강요한다는 것. 자신보다 늦게 출근하고 빨리 퇴근하는 것을 티가 날 정도로 싫어했기에 우리도 일 중독자 같은 그의 업무 스타일에 맞춰갈 수밖에 없었다. 야근 후 집에 와서도 새벽이고 뭐고 없이 날라오는 업무 관련 메시지는 덤이었다. 팀장은 퇴근은 늦었지만 출근은 9시에 맞춰 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철 안에서 메신저 앱을 확인해 보니 팀장에게 보낸 메시지의 ‘1’은 없어졌다. 그가 내용을 확인했다는 거고, 별다른 답장이 없다는 건 이걸로 됐다는 거다. 이제야 찾아온 마음의 평화.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몸에서 힘을 빼고 열차 출입문 옆 철봉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왼쪽 어깨를 가볍게 쳤다.
“주호 씨.”
아까 부딪혔던 남자의 사나운 표정이 떠올라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바로 앞에 한 여자가 무안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뭘 그렇게 놀래. 뭐 이상한 거라도 보고 있었던 거야?”
같은 팀 선배인 한미수 대리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있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리님, 집이 반대 방향 아니었어요? 그런데 여기서 뵙네요.”
“이것 때문에.”
미수 대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기 폰을 내 쪽으로 내밀자 익숙한 패턴의 메신저 창이 보였다. 화면 왼쪽 상대방의 말풍선은 짧은 질문이었고 오른쪽에 자신이 쓴 답글은 위아래로 길게 늘어진 직사각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팀장님한테 답장하느라 역을 지나친 줄도 몰랐지 뭐야. 그러다가 다시 돌아오는 중이지 뭐.”
입술을 삐죽거리는 그녀의 투덜거림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도요”라고 말하며 깨진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고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해줬다. “오늘 우리 둘 다 아침부터 액땜 제대로 하네”라며 웃는 얼굴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요 며칠 미수 대리를 대하기가 어색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게 다행이다 싶었다.
지난주 자정이 다 된 시간까지 회사에 남아 있던 날에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 10시가 조금 넘어 팀장님이 퇴근하고 모두 하나둘씩 자리를 떴는데 나만 일이 끝나질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12시 넘기고 택시비 지원받아서 편하게 가자는 생각에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엑셀 수식을 기계적으로 변경하면서 숫자를 뽑아냈다.
마침 스트리밍 앱에서 아바의 댄싱퀸이 흘러나왔고 가사를 아는 부분만 따라 불렀다.
You are the Dancing Queen, young and sweet, only seventeen
아바의 노래에서는 내내 흥겨운 가운데 구슬픈 기운이 중간에 끼어든다. 그때도 다르지 않아 이 밤에 나 혼자 이게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어 “아. 나도 여자 친구 만들어서 섹스 신나게 하고 싶다”라고 꽤나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이어 올드팝이 몇 곡 플레이 되었고 일이 끝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 봤을 때 나는 너무 놀라서 ‘으아악’하고 비명을 질러버렸다.
분명히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한미수 대리가 거기 앉아 있었다. 난 이어폰을 귀에서 뽑아내고는 언제 왔느냐고 물었다.
“배고파서 잠깐 김밥 먹고 왔는데.”
“저, 혹시 제가 노래하는 거 들으셨어요?”
“올드팝 콘서트장 온 줄 알았네. 후후.”
미수 대리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느라 눈가에 예쁘게 주름이 졌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정도 위인 걸로 알고 있는데 동안이라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작고 아담한 체구, 동그랗고 뽀얀 얼굴에 쌍꺼풀진 두 눈도 동그랗다. 볼 때마다 햄스터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입 밖으로 내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주호 씨 나이에 어떻게 그런 옛날 노래를 따라 불러? 다들 뉴진스나 뭐 그런 아이돌 좋아하지 않아?”
“전 옛날 노래가 더 좋더라고요. 그런 것만 듣다 보니 알고리즘에 비슷한 노래만 나와요. 조지 마이클, 빌리 조엘, 이글스, 뭐 이런 것들이요.”
“어머. 나랑 똑같네. 나도 올드팝 팬이거든.”
그녀의 눈이 반짝였으나 난 노래 얘기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혹시 혼잣말한 것도 들었을까.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뭐 다른 말 한 것도 들었어요?”
응 뭐? 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미수 대리는 한쪽 눈만 살짝 작게 찡그리고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되게 귀엽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가 더는 같이 있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한 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분명히 들었을 거야. 기분 때문인지 몰라도 그때부터 마주치면 그날 밤처럼 한쪽 눈으로만 웃으며 날 보는 것 같았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정신없는 하루였다. 아침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점심시간인데도 배고프지가 않았다. 대신 지독한 졸음이 몰려왔다. 책상 위에 고개를 파묻고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왁자지껄한 소리에 눈을 뜨니 벌써 1시가 지나 있었다. 책상 오른편에는 참치마요 삼각김밥과 바나나우유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메모해 놓은 포스트잇도 없어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합시다. 6시 되면 모두 일어나는 걸로.”
팀장의 말에 모두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입만 뻐끔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팀장이 손바닥을 한 번 마주쳐 짝, 소리를 내며 말했다.
“요즘 제가 여러분 힘들게 한 거 알고 있고,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회사 사정이 있었고, 이제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가는 분위기입니다. 잘 따라와 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하루 두 명씩 연차 쓰고 쉬자고 하면서, 기운 내라고 말을 이었다. 정말 아침 일이 액땜이었던 건가. 오늘은 정시 퇴근이라는 설렘에 미친 듯이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여섯 시에서 일분 지나서 컴퓨터를 껐다. 오후에는 화장실에 가지고, 휴대폰을 들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까지 입력해야 할 데이터와 완성해야 할 보고서에만 집중했다. 개운한 마음으로 회사 건물을 나오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이런저런 알림을 하나씩 지워 나가던 중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는 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이 놀라서는 우뚝 서 있는 내 왼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쳐 갔다. 그때 매서운 시선을 느꼈으나 난 여전히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온 건데 지금 답장하는 게 너무 늦지는 않았기를. 나는 바로 미수 대리가 보내온 메시지에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 주호 씨, 오늘 둘 다 일찍 나갈 것 같은데. 올드팝 틀어주는 LP 바에 가서 맥주 한잔할까?
- 앗. 좋아요. 답이 너무 늦었죠. 지금 어디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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