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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날 위해 슬퍼 말아요]

 

질퍽했던 도로가 하루 만에 깨끗해졌다. 한낮의 햇살에 쌓여있던 눈이 말끔히 녹아내렸다. 어제 종일 긴장한 채 운행한 탓인지 목덜미가 뻐근했는데 다행이다 싶어 영호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휴게실에서 동료 기사들과 노선에 공사 구간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눈 후 일어나 화장실에 들렀다가 버스가 줄지어 서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오후 운행으로 왕복 두 번을 다녀오는 일정이다.

 

영호가 운전하는 301번은 송파구 남쪽 구석에서 시작해 종로구 혜화동에서 끝나는 긴 노선이고 서울 도심을 관통하기 때문에 운행 시간이 제법 걸린다. 중간에 화장실 갈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기 때문에 식사는 물론 마시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방금 휴게실에서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동료들도 사정을 알기 때문에 운전을 앞둔 사람에게는 마실 것을 권하지 않는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맨 다음 악셀을 밟았다. 전기 모터 차량이라 기어 조절이 필요 없어 몸은 편했지만 가스 엔진보다 반응 속도가 너무 빨라 발바닥에 힘을 주는 데는 아직도 신경이 적잖이 쓰였다. 가락시장을 지날 때까지 승객이 몇 탔지만 화요일 오후 시간이라 차내는 한산했다. 진욱은 잠시 고민하다가 라디오를 켜고 자주 듣는 FM 채널로 주파수를 설정했다.

요즘은 버스에서 라디오를 틀어놓는 경우가 별로 없다. 젊은 기사들은 라디오를 잘 듣지 않고, 어떨 때는 시끄럽다고 승객 민원이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내년이면 쉰 살이 되는 영호는 여전히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한번은 신경 쓰인다며 라디오를 꺼달라는 젊은 승객의 요구가 있었는데 “세상 사는 이야기라도 들으면서 가시면 좋지 않겠냐”라고 영호가 주름이 가득한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말했다.

 

머리가 희끗한 좋은 인상의 아저씨. 사람들은 대체로 영훈을 이렇게 기억했다. 양쪽 끝이 아래로 처진 눈매에 얇은 쌍꺼풀까지 있어 자신은 무표정해도 웃는 얼굴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무슨 일에도 화를 안 낼 것 인상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늘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매를 가졌다는 말도 들었다. 지금이야 얼굴과 몸에 살이 꽤 붙었지만 매일 뛰어다니며 몸을 쓰는 일을 하던 40대 초반까지는 날렵한 몸매를 유지했다.

 

선한 인상 덕분에 용의자를 취조할 때 가끔 하는 연기가 꽤나 잘 먹혔다. 순둥이 같은 분위기의 영훈이 느닷없이 분노에 휩싸여 화를 못 이기는 척하면 강력범들도 겁을 집어먹고 범죄 사실을 털어놓곤 했다.

두 번째 직업이자 가장 오래 해온 경찰 일이 싫어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모른 척 지나치면 됐을 내부 비리에 괜한 정의감을 내세운 탓이었다. 공익제보자라는 허울 좋은 포장은 폐쇄적인 경찰 조직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루아침에 배신자 낙인이 찍힌 영호는 미련 없이 직장을 떠났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깨 위에 책임을 짊어지길 의식적으로 피해온 삶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 때면 기억나는 사람과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젠 흐릿해진 그 얼굴을 오랜만에 추억하며 이 노래를 신청합니다.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의 나긋한 목소리에 이어 80년대 가요 다운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버스는 잠실을 지나 코엑스 앞 정류소에 도착했고 네 명의 승객이 버스에 올랐다. 교통 카드를 대고 운전석 옆을 통과하는 그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중에 한 사람의 얼굴에 영호의 시선이 꽂혔다. 스치듯 지나간 그 여자의 옆모습에 놀라 버스 문을 닫는 것도 잊은 채 잠시 눈을 몇 번 껌뻑였다. 어서 출발하라고 재촉하며 뒤에 있는 버스가 클랙슨을 울리자 그제야 영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

검은색 정장 위에 회색 코트를 입은 직장인 남자는 빈자리가 많음에도 뒤쪽 버스 출구 앞에 손잡이를 잡고 서서 다른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녀 커플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속삭이며 웃었다. 그 여자는 운전석 뒤 쪽 일인용 좌석에 앉았다. 신호 정차 때마다 영호는 룸미러와 차내 CCTV 화면을 통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 보려 했다.

 

하얀색 패딩 위로 자연스럽게 웨이브 진 검은색 머리가 어깨 부근까지 내려와 있었다. 나이는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눈가에 희미하게 푸른색의 터치가 보이지만 화장기가 거의 없는 갸름하고 단정한 인상의 여자.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 얼굴은 영호가 잘 알던 사람과 많이 닮았다.

잘 알다 뿐일까.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였고 평생을 같이 살자고 약속했던 사람이었다. 인생을 송두리 째 하느님께 바치겠노라 다짐한 맹세를 깨고, 로만 칼라를 벗어던질 만큼 사랑했던 여자.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지금까지도 지우려 해도 지우지 못한 이름. 안수진의 얼굴이었다.

 

손영호 바오로 신부님. 이렇게 불리던 때가 있었다. 갓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영호는 서울 옥수동 본당으로 부임했다. 모든 것에 어리숙한 애송이 보좌 신부였던 그는 근엄하고 매사에 진중한 주임 신부님 밑에서 꽤나 고생을 했다. 친근하게 신자들에게 다가서고 싶었으나 노년의 사제는 “하느님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우리는 신자 위에 군림해서도 안 되나, 그러면서도 경박해서는 안 된다”면서 ‘불가근 불가원’의 사자성어를 귀에 딱지가 얹을 정도로 그에게 강조했다. 신자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하루에 몇 번씩 잔소리에 시달렸지만 일주일에 두 번만큼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 어린이와 중등부 미사와 일요일의 청년 미사였다. 보좌 신부가 책임지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주임 신부님은 늙은이가 간섭하면 어린 신자들이 싫어한다며 그에게 두 미사에 대한 전권을 맡겼다.

 

젊은 손영호 바오로 신부도 그 시간을 즐겼다. 평일 미사나 주일 새벽 미사에서 제대 바로 앞 신자석에 앉아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신실한 신자들의 간절한 눈빛을 대할 때와는 달리 어수선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좋았다.

청년부를 대할 때는 꽤나 긴장이 되었다. 사제라는 이유로 그다지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친구 뻘 되는 신자들에게 강론을 하고 가르침을 줘야 한다는 부담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토요일 미사가 더 즐거웠다. 초등학생이나 청소년의 순수함에 아무 중압감 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여름 수련회에 함께 가서 물장구를 치고, 어린이 복사단을 데리고 극장에 가서 만화 영화를 보기도 하면서 ‘신은 아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온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이 일을 직업으로 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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