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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Golden Slumber

은고랭이 2021. 8. 6. 14:17

이건 꿈이야. 호진은 알 수 있었다.
그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방배동 골목에서 아들 E와 초등학교 셔틀버스를 타러가고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고, 아이의 모습이 3년 전 갓 입학할 때처럼 아기같기 때문이었다. 신발 사이즈가 벌써 호진과 비슷하게 커버렸음에도 꿈에서 아들은 조그만 손을 꼬물거리며 호진을 꼭 잡고 있었다. 꿈이지만 달콤하다, 이대로 깨고 싶지 않다고 호진은 생각했다.

어느틈에 아이의 손을 놓쳐버렸다. 호진은 아이를 찾아 어린 시절 동네 골목을 뛰어다녔다. 숨이 가빠오며 덜컥 겁이 나는 순간, 눈이 떠졌다. 어스름한 새벽빛 아래 침대 옆에서 곤히 자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마음이 놓였다. 현실의 아들은 더 이상 조그맣지 않았다. 어린이에서 소년으로 커가는 모습이었지만 아직도 아기로 보였다. 호진은 가만히 머리와 볼을 쓰다듬고 옆에 살며시 누웠다.

가장 먼저 입 밖으로 낸 단어가 ‘아빠’인 아이였다. 갓 태어난 생명체의 눈에 가장 많이 들어온 인물이 호진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승무원인 아내는 첫 돌이 지난 후 다시 해외로 비행을 떠나야 했다. 한달에 20일은 엄마가 없는 상황에서 아가를 돌보는데 양가 할머니들의 정성이 큰 힘이 됐다. 다행히 E는 두 집안의 첫 손주였다. 할머니들은 애정과 희생을 기꺼이 동원해 주었다. 하지만 두 분에게만 의지하기에는 호진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호진은 저녁 약속을 줄이기 시작했다. 되도록 빨리 퇴근해 은호를 돌보는 것이 아빠로서, 아들과 사위로서 마땅히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지하철 역 하나 거리의 회사로 옮기기도 했다.

아이를 두 손으로 안아서 재워야 할 때, 호진의 오른 어깨는 포옥 안긴 아이의 숨결에 늘 젖어있었다. 그 달큰한 침내음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았다. 며칠간의 침이 말라버린 잠옷의 오른쪽에서는 아이의 내음이 늘 조금씩 남아있었다. 아이가 조금 더 자란 후에는 불을 끄고 옆에 비스듬히 누워 한쪽 팔로 아이를 감쌌다. 아이는 어둠 속의 두려움에서 아빠의 팔로 보호받길 원했다. 이런 저런 창작 이야기로 아이가 잠에 들려 하면 호진은 늘 똑같은 말을 아이의 곁에서 속삭였다.

“아빠는 이 세상에서 E가 제일 좋아”
“아빠는 맨날맨날 E랑 같이 있고 싶어”
“E야, 사랑해. 좋아해. 고마워”

아이가 새근새근 잠든 숨소리를 내기 시작해도 채 10시가 되지 않았다. 잠기운이 없는 호진이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가 TV라도 켤라치면 앵, 하는 소리와 아빠를 찾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서둘러 화면을 끄고 방으로 가는 호진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는 서둘러 커갔다. 열 살을 지나며 아이는 공부방이 생겼고, 자기 침대가 생겼다. 아빠와 노는 것보다 모바일 게임이 더 좋아지며 자신의 침대에 비스듬이 누워 친구들과 줌이나 전화를 하며 게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호진은 이제야 자기 시간이 조금씩 생겨났지만, 정작 무얼 해야할지 몰랐다. 신문을 뒤적이거나 책을 읽어봐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틈만나면 아이 방을 들락날락 거리다 보니 아내와 아이에게 잔소리만 듣게 되었다.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잠시 주어진 선물일 뿐입니다.’

육아 기간을 소중히 여기세요라는 뜻이었을테다. 호진은 E가 태어나기 전 구청에서 운영하는 ‘예비 아버지 교육’을 들었다. 강의 내용 중 기억나는 유일한 이 내용 때문이었을까.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호진이 E와의 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왔다. 이젠 E의 세상에서 호진의 자리는 줄어들고, 아이 자신만의 세계가 커지고 있다. 서글픈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시간을 얼마나 바랬었던가. 이젠 무작정 같이 보내는 시간의 양보다 아이와 호진의 세계가, 관심사가 겹치는 공감의 질이 중요해졌다. 그럴려면 호진도 자신의 취향을 다시 찾아야 했다. 아이가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면 더 좋을 것이었다.

희생하는 아빠, 고마운 아빠를 원하는 것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아기나 어린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아빠는 재미있는 사람, 스스로 행복해 하는 어른일 것이다. 호진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엊그제 만져본 것 같은데 오래지나 다시 장비를 잡을 때 온 몸으로 전해오는 이질감 같은 것이 가슴에 가득찼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하나 하나 잠깐이라도 시도해 봤다. 무얼하는게 가장 좋을까 고민만 하고, 아무 것도 안하는 시간이 가장 아깝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온라인 강의로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일본어를 시작했다. 어색했던 히라가나, 가타카나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던 한자를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하게나마 발음할 수 있게 됐다. 어제보다 조금 더 발전한 오늘을 만드는 것이 큰 기쁨이라는 것을 호진은 기억해냈다. 재미가 붙었다. 옷장 깊숙히 넣어놨던 기타를 다시 깨냈다. 오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것 치고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투웅, 스트링을 넘겨봤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곧 다시 기타를 잡게될 거라는 걸 호진은 알 수 있었다.

아직 마흔 중반이다. 새로운걸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다. 멋진 아저씨로 늙고 싶다. 호진은 E에게 멋진 아빠로 보여지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진 못하더라도 널 키우는 만큼 능력은 있어. 하지만 아빠가 더 바라는 것은 네가 마음을 열고,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동반자가 되는 거란다. 호진은 청소년기에 자신의 눈에 비쳤던 아버지처럼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멈춰버린 옛사람이 되기 싫었다. E의 세계에서 움직이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이제는 E가 먼저 아빠를 찾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호진이 E의 방문을 노크할 것이다. 기꺼이는 아닐지라도 E가 문을 열어주기를. 그리고 자신의 세계에 가끔 들어오는 아빠에게 의자 하나 정도는 내어주기를.

“아빠는 E랑 있는 시간이 제일 좋아. 아빠는 맨날 맨날 E와 같이 있고 싶어”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갓난아기 시절부터 몇천 번이고 아이의 귓가에 속삭인 이 말은 한번도 과장된 적이 없었다. 호진은 E와 함께하는 방법을 새로이 배워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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