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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고작 그게 다예요?”
“난 언제나 백팩 하나로 챙길만큼 밖에 짐이 없어. 봐봐, 노트북 거치대도 없이 책 쌓아서 높여 놓았잖아.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늘 단촐하다 못해 휑하던 신팀장의 책상이 이제 정말 텅 비었다. 출입문 밖으로 배웅을 나가던 호진이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제 술자리 파할 때 꼭 포옹을 했었기에 그때만큼의 감흥은 아니지만, 그래도 찡하긴 마찬가지였다. 연락 드릴게요, 자주 뵈요.
호진보다 1년 먼저 경력직으로 입사했던 신팀장이 떠났다. 호진의 옆 팀인 고객 정보팀장이었던 그는 지난 5년 간 호진의 동료이자 스승이었고, 마음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형이었다.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는 호진은 그를 경계했다. 첫 회의에서 신 팀장의 발표 화면을 보며 이 회사에도 저렇게 기획서를 잘 만드는 사람이 있나, 아니 저건 컨설팅 회사나 어디 밖에서 만들어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다. 그가 컨설팅 회사를 거쳤고, 꽤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라는걸 안 것은 꽤 이후였다.
“우리 호진이도 능력을 더 발휘해야 할텐데, 회사가 계속 쪼그라 들어서 어떡하냐, 마케팅은 돈을 쓸 수 있어야 되는데”
“거 도망치는 사람이 뭘 남겨진 사람 걱정을 하고 그래요”
“잘 생각해봐. 너 정도 능력이면 여기 말고도 찾아보면 대안 많을거야”
“난 이 회사 좋아요. 나름 기반 닦은 것도 있고. 어디 딴데 가서 머리 큰 놈이 처음부터 다시 적응하는거, 아우 이젠 늙어서 못하겠어”
그렇게 신팀장과 헤어진게 벌써 반 년 전이었다. 그간 한 차례 만나 소주 나눌 기회가 있었고, 한 번은 호진에게 자신의 회사로 오는게 어떠냐는 제안도 있었다. 이번 주까지 고민해보겠다고 호진은 답했으나, 그 건으로 다시 전화가 오간 적은 없었다. 선수들끼리의 암묵적인 신호였다. 보낸 오퍼에 대한 무응답은 점잖은 No라는 것.
신팀장은 떠나기 전 외장하드에 파일 백업을 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언젠가 호진에게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었는데, 머리 속에 다 있는데 뭐하러 따로 자료를 옮기냐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위에 고개를 숙이고 남에게 맞추는 능력은 그 스마트함에 따르지 못한 것이 그가 임원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선을 넘어서지 못한 이유였다. 신팀장이 떠난 뒤 이런 저런 뒷 이야기가 돌았다. 호진은 그 화제에 입을 열지 않았다.
새로 산 외장 하드의 성능은 좋았다. 계열사 이동을 앞둔 호진은 파일을 가지고 가야 했다. 소속은 옮겨도 하는 일은 연속되니 업무 히스토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호진은 스스로 신팀장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10기가 바이트가 넘는 파일들이 옮겨지는 속도는 예상보다 빨랐다. 예전 이직할 때, 약 10년전에 샀던 외장 하드는 이 정도 용량을 담아내는데 거의 반나절이 걸렸는데, 그 사이 기술은 진보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광고인이 된, 호진이 대리였던 시절의 사수 장호는 신팀장과 반대였다. 무엇이든 자료를 ‘구워냈다’. 외장하드 등장 이전, CD와 DVD에 파일을 담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의 컬렉션은 실로 방대했다. 광고회사 AE의 일이란게 그랬다. 경쟁 PT용 광고기획서에 한 사람의 업무역량이 응축되어있기 때문에, 많이 볼수록 타인의 핵심 기술을 훔쳐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것은 물론 팀 친한 선후배가 만든 것, 옆 팀에서 사용한 것, 다른 광고회사의 ‘선수’들이 만든 것까지 도대체 이걸 어떻게 얻었을까 싶도록 샅샅히 긁어모았다.
장호의 자리에는 이동형 DVD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면 파일이 빼곡히 저장됐다. 디스크가 만들어진 후 차곡차곡 파우치에 담아내는 장호의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장호가 수십 장의 DVD를 지닌 채 다른 회사로 옮기고 난 후, 호진도 열심히 디스크를 구웠다. 첫 회사를 그만둘 때, 두 번째 옮길 때도 구웠고, 세번 째부터는 외장하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DVD의 시대는 갔다. 요즘 노트북은 디스크 슬롯이 없다. 파일이 가득찬 외장하드가 집에 두 세개 있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호진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굽고 옮긴 파일의 양이 늘어난만큼 호진의 실력도 늘었을까. 하드에 옮겨진 지식의 양과 호진의 머리에 자리잡은 경험은 비례할까. 그 중에 아직까지 유효한 것들은 얼마나 될까. 과거의 자료와 경험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춰줄 수 있을까. 작년과 올해가 다르고, 먹히는 말은 줄어들고, 자신이 애써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매년 늘어났다. 그것들도 하드에 밀어 넣듯이 내 머리 어딘가에 소복하게 쌓여가면 좋을텐데.
- 신고합니다. OO사로 그룹사 전출을 명 받았습니다.
- 이제 저도 떠나네요. 제 뜻은 아니지만. 곧 짐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 그때 형님 오라고 할 때 갈걸 그랬나봐요 ㅎㅎ
카톡으로 신팀장에게 전출 소식을 전하는 사이 어느새 파일 전송이 끝나버렸다. 그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보니 호진도 짐이 꽤 줄어 있었다. 백팩 하나로는 부족하지만 쇼핑백 하나만 더한다면 충분할 정도였다. 하지만 난 머리 속에 다 있어서 짐이 필요없다고는까지는 말 못해. 아직 메신저 창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호진은 메신저 창에 이렇게 더했다.
- 저도 이제 짐이 꽤 단촐해졌어요. 왠지 가볍고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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