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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사무실이든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화면은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파워포인트 아니면 엑셀. 살짝 구부러진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살포시 놓여있거나,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른 채 오른 손을 상하좌우로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은 파워포인트 장표를 채우는 중일 것이다. 그렇게 하루에 수만 개의 파워포인트 파일이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파일을 부르는 이름도 제각각인데 보고서, 기획서, 혹은 자료라 불리운다.
“문서작성 능력은 사무직에게는 무기와 같은거야. 내 생각과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지. 이 역량은 늘 갈고 닦아야 해”
팀원들이 만든 파일을‘첨삭’해줄 때면 호진이 늘 잔소리처럼 하는 말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기획서’였다. 단어 그대로 작성자의 ‘기획’이 녹아있어야 한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 상대방에게 제안하고 싶은 내용, 설득하고자 하는 주장을 조리있게 정리하는 문서가 아니면 시간과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 광고회사의 신입 사원으로 일을 배운 호진이었기에 기획서는 작성자의 얼굴과 같은 것이었다.
광고 회사가 몇 주에 걸쳐 준비하는 경쟁 PT는 기획서의 완성도에 성패가 갈린다. 프리젠터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기획서에 어떤 참신한 아이디어가 담겨있고, 그 생각이 얼마나 설득적으로 전개되는가에 있다. 때문에 어떤 단어를 고르고, 어떤 폰트를 선택하고,각 페이지의 호흡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의 능력이 곧 광고인의 역량이었다. 많은 글과 복잡한 도표는 오히려 해가 됐다. 심플할수록 메시지의 힘이 실린다는 것을 배웠다. 때론 비어보이는 페이지가 더 설득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컨설턴트가 만든 것들은 광고 기획서와 사뭇 달랐다. 페이지는 꽉 채워져 있어야 했고, 복잡한 그래프와 숫자는 필수였다. 광고 회사를 떠나 대기업 전략 부서에서 일할 때 호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팀원이 컨설팅 출신이었다. 그들은 ‘제안서’를 만든다고 했다. 호진은 처음엔 그들의 제안서를 이해하는데도 벅찼다. 모양은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었지만, 그가 만든 제안서의 내용은 뒤죽박죽이었다. 호진은 야근을 자처하거나 주말에 출근했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컨설턴트 출신 에이스가 만든 제안서를 그대로 베꼈다. 쓰는 단어와 어투를 파악했고, 그래프에는 어떤 색상을 넣고 표의 선 굵기는 어떻게 하는지 따라하며 익혔다. 하지만 제안서의 메시지를 구성하는 맥락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컨설턴트로 일하는 대학 선배를 찾아 점심을 대접했다. 가르쳐 달라고 했다. 어떻게 만들어야 그들처럼 할 수 있는지 속성 과외를 받았다. 평소 까칠한 성격의 선배의 강의는 친절하진 않았지만 효과적이었다. 그가 툭툭 던지는, 맥락없어 보이는 질문 속에 날카로운 실마리가 숨어 있었다.
“네가 만들어가는 제안서를 보는 사람, 주로 임원이겠지만 그 사람이 쏟을 수 있는 주의력이 몇살 정도 되는 나이일 것 같냐?”
“글쎄요…. 한 중학생 정도?”
질문의 의도를 짐작한 호진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를 답했다.
“다섯 살이야. 다섯 살. 딱 그 정도 집중력으로 네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해라”
다섯 살이면 사람말을 제대로 구분이나 할 수 있을까.
“그들이 모자라서가 아니야. 너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의 제안을 듣고 의사결정해야 해. 네 프로젝트가 너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그들에게는 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야”
중요한 대목은 지금부터였다.
“다섯 살 아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심플해야 돼. 그래서 페이지마다 젤 위에 있는 문장, 거버넌스 메시지가 중요한거야. 아래 도표나 숫자들은 그 메시지의 근거가 될 뿐이야. 초보일수록 그걸 그럴싸하게 만드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보고받는 사람들은 정작 그거 신경도 안써”
“네가 몇 장을 만들던, 거버넌스 메시지만 읽으며 넘겼을 때 말이 이어져야 돼. 그 문장들만 모았을 때 논리가 있어야 돼. 그게 다섯살 짜리한테 이야기하는 방법이야”
선배는 파워포인트는 제일 마지막에 열라고 했다.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스토리를, 각 페이지의 핵심이 될 문장들을 정리하라고 했다. 몇 주간 호진이 산 점심값의 가치는 충분했다. 선배의 충고는 나중에 알고보니 ‘일도일사(1圖1事, 1 Slide에 1 Message)’라는 원칙이었다.
호진이 가장 싫어하는 명칭은 ‘자료’였다. 그 안에는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하고자 하는 제안도 없었다. 단순한 현황 파악이나 수치의 나열로 이어지는 수십 장의 슬라이드. 숫자가 이야기하는 발견이 없는 복잡한 도표들. 윗사람들이 ‘다섯 살짜리 집중력’으로 힐끗 보고 페기되거나, 미팅룸 스크린에 배경처럼 띄워진 채, 회의 후엔 누구도 찾지 않을 시한부 소품이 될 자료들. 그런 용도를 위해 누군가는 밤을 세워가며 구부정하게 모니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린다.
‘자료’에는 원작자의 흔적이 없다.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만의 개성이 녹아있지 않고, 돋보이는 기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몇 번의 리뷰를 거칠 때마다 날카로워지기는 커녕 무뎌진다. 의견이 더해질수록 누군가는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이 있고, 다른 이는 부풀리고 싶은 대목이 있다. 그러게 누더기가 된 몇 십장의 장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자료를 대한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이 질문은 그러나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파워 포인트’라는 명칭에 이 프로그램을 만든이의 의도는 충분히 담겨있다. ‘포인트에만 파워를 싣는다’ 하지만 누가 그 이름에 걸맞는 기획서나 제안서를 만들고 있는가. 호진 주변에서 이 시간에도 작성되는 있는 ‘자료’에는 포인트가 몇 개나 담겨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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