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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페시 모드 듣고 있었나봐요”

 

호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소개팅 상대가 자리에 앉은지 몇 분 안되어 꺼낸 말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듣고 있던 MP3 플레이어에 곡 이름이 띄워진 채 테이블에 놓여있었다. 전성기를 한참 지난, 그렇게 대중적이지도 않은 신스팝 밴드 이름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로수길에서 만난 소개팅 상대여서 그 사실이 더 신선했다. 얼굴이 다시 보였다. 지금은 아내가 된 그 여자의 그때 표정을 호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호진은 그 날의 그녀가 보여준 모습과 표정을 거의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겨울비가 보드랍게 내리던  초겨울이었다. 그리 춥지않던 날씨에 옷차림은 계절에 비해 가벼웠다. 검은 색 스키니한 바지에 검은색 점프수트를 입고 있었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머리는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있었다. 약간 푸른 기운이 있는 색으로 눈 주변에 화장을 했다. 처음 만난 여자는 무척이나 예뻤다. 그 때까지 호진이 말을 한 번이라도 나누었던 여자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소개팅을 주선해 준 업계 선배 형이 한 말은 모두 맞았다. 키가 크고, 예쁘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좋은 가정에서 자랐고 생각이 바르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너무 재밌어서 좋았어. 처음 만난 날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몰라”

 

호진이 떠올리는 첫 날 아내의 모습에는 웃는 얼굴이 많았다. 그가 하는 말에 낭랑하게 울리던 웃음소리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예쁜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가만히 있으면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인상의 그녀가 호진을 바라보며 웃음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쳐 주는 것이 좋았다. 별 것 아닌 회사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뭐가 그리 웃겼을까. 

 

지금은 없어진 지 오래인 가로수길 초입에 있던 ‘카페 스트라세’는 평일 저녁이어서인지 한산했다. 커피잔을 앞에두고 한 시간 가량 지났을 때, 호진은 와인 한 잔 어떠냐고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점찍어 둔 곳이 있었다. 역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인 와인바 ‘핑퐁’에는 매장 구석에 조그마한 다락방 같은 공간이 있었다. 단골만 아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조그마한 방이었다. 호진은 소개팅 초반의 분위기가 좋으면 그 곳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의 아내는 소녀 같았다. 방의 조명 때문이었는지, 와인에 물들었는지 볼은 발그레 들떠있었다. 호진보다 두 살 연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카페에서 아직 서로 어색할 때, 그녀는 자기가 더 나이 많다는 걸 알고 나왔는지 물었다. 호진은 뭐라 답했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날은 아내가 누나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오히려 동생 같았다. 그저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았을 뿐이었다. 소개해 준 선배가 고마웠고, 지난 몇년 간 자신을 데리고 가로수길의 좋은 와인바를 누벼준 형들과 누나들에게도 감사했다. 

 

그녀의 직업은 승무원이었다. 소개받을 때 알고 있었다.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을까. 디페시 모드를 알고 있고, 호진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모습이 놀라웠다. 승무원은 도도하지 않을까.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줄까. 한 번 만나기나 해보자, 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서로 조금씩 알아갈수록 확인할 수 있었다. 화려한 외모 안에 자리잡은 ‘그저 한 여자’의 모습을. 호진은 첫 눈에 반했다.

 

와인바에서 나오니 엷은 빗줄기는 어느새 소복하게 내리는, 하지만 쌓이지는 않는 눈송이로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은 와인 두 병을 마셨다. 꽤나 취해있었다. 그녀도 술이 꽤 센 편이었다. 이미 시간은 11시가 지나 있었다. 하지만 호진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서로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 오래전에 가 본 ‘전자신발’이 생각났다. 도산사거리 근처에 있는 뮤직바였는데, 신청곡의 공연 실황 비디오를 틀어주기도 하는 곳이었다. 호진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한 군데만 더 가보자고, 음악을 크게 들을 수 있는 곳이 근처에 있다고 했다. 그녀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 역시 호진 못지않은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디페시 모드를 알아봤을 때부터 평범한 취향은 아닐거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호진의 처형이 된 언니와 아내는 록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헤비메탈 보다는 모던록 쪽이었다. 호진은 잘 몰랐던 INXS를 가장 좋아했다고 했다. 브릿팝을 좋아하는 호진에게는 더 할나위 없이 마음을 뺏긴 이유였다. 둘은 전자신발에서 맥주를 마시며 U2의 공연실황 영상을 나란히 앉아 봤다. 호진은 이미 취해있었다. 맥주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영상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음악소리가 커서 이야기를 나누려면 그녀쪽으로 몸을 기대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야 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드럼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도산사거리에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내일 해외로 비행을 떠나야 하는 그녀는 너무 많이 마셨다고, 내일 음주 근무할 것 같다고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녀와서 또 만나자고 호진은 말했다. 오늘 못잡은 손을 다음에 만나서 잡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 시간은 새벽 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2007년 12월의 어느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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