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Energy flows

은고랭이 2021. 8. 21. 09:38

노트북 모니터에 55명의 얼굴이 모자이크 형태로 비춰지고 있었다. 왼쪽 가장 위 박스에서 강사가 활발한 손동작으로 참여자들을 환영했다. 밝은 하이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나의 에너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주제에 어울리는 강사를 섭외한 것으로 보였다. 호진은 재택 근무로 온라인 강의를 들을 예정이다.

새로 옮긴 회사는 온라인 전문 기업답게 고성능 노트북을 지급했으며, 슬랙과 줌을 적극 활용하는 등 재택근무 인프라는 훌륭했다. 첫 날은 노트북 세팅과 외부망 접속 설정에 끙끙대며 하루를 보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며칠 사용하다보니 걱정했던 것보다 훌륭했다. 회의실에 모두 모여 한 사람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하는 이전의 광경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세상은 착실히 진화해 오고 있던 것이다.

호진과 함께 조직 이동으로 옮겨온 사람들의 얼굴을 조그만 화면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대다수가 호진보다 어려보였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어색함과 긴장이 어려있었다. 강사는 이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가벼운 질문을 개인별로 물었고, 별 것 아닌 답에도 과하다 싶을 정도의, 하지만 나빠보이지는 않는 반응을 보였다. 몇 차례례의 웃음이 이어졌고, 분위기는 차츰 좋아지고 있었다.

7살 아들의 엄마라고 소개한 강사는 책장이 배경으로 보이는 자신의 방에서 강의를 진행했다. 자기소개 내용이 호진의 관심을 끌었는데, 홈쇼핑 쇼호스트 출신이라고 했다. 보다 정확히는 자기를 소개하는 세 개의 문장 중 거짓인 것을 고르는 퀴즈 중에 하나가 ‘나는 홈쇼핑 쇼호스트 출신이다’였다. 호진이 고른 답이었다. 같은 답을 고른 다른 참가자에게 강사가 선택한 이유를 묻자 ‘쇼호스트 연봉이 프리랜서 교육강사 연봉보다 높기 때문에 굳이 이 길을 택했을리가 없다’라는 답이 나왔다. 호진도 수긍이 가는 논리였다. 강사는 실제 쇼호스트로 일한 적이 있었지만 계약직이었고, 자신이 그만둔 것이 아니라 ‘그만둠을 당했다’고 밝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자부했는데, 주문 실적은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기에 퇴출당했다고 했다. 그 경험에서 자신이 겪은 좌절을 이야기하고 그걸 이겨내고자 한 공부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교육 참석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호진도 그 중 하나였다. 기분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강의 내용에 딱 맞는 이야기였다. 아직 아침이라 아이는 아직 자고 있다며 밝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호진은 그 집안의 상황을 상상했다. 친정 엄마에게 아이가 일어나면 아침밥을 챙겨달라고 부탁을 했으리라. 일하고 있는 방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신신당부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 밤 늦게까지 교육안을 정리할 때는 놀아달라는 아이의 칭얼거림을 못본체 해야 했겠지.

교육이 진행되며 호진은 줌의 기능이 이렇게 다양한지 놀랐다. 50명이 넘는 교육생을 10개의 소그룹으로 나눴다가 다시 합칠 수 있었으며, 간단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다. 교육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1절지 전지에 메모하는 것과 같이 자판을 통해 모두의 글을 모아서 보여주는 사이트로 링크를 하기도 했다. 강사는 요즘에는 줌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도 유용한 업무 경쟁력의 하나라고 했다. 호진이 보기에도 정말 그랬다. 강사는 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지. ‘내 안의 에너지를 채워라’ 강의 내용보다 강사의 모습 자체가 호진에게 더 많은 에너지를 전해줬다.

내안에 에너지가 가득찼던 가장 최근의 일은 무엇이었을까. 호진은 지난 겨울을 떠올렸다. 호진은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꽤 능숙하게 다룰 줄 알게 되었다. ‘프리미어 프로’ 프로그램 강습을 받았기 때문이다. 신사업 프로젝트가 막 오픈을 앞뒀을 때 마케팅 준비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회사의 마케팅 지원이 어려웠고, 신사업팀만의 힘으로 무엇이든 해야 했다. 홈인테리어 DIY 전문 상품들은 대부분 생소한 것들이었기에 사용법을 영상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유튜브에도 올리고 매장의 모니터에 노출하여 어떻게 실생활에 사용되는지 알려준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다. 문제는 누가 만드느냐였다.

호진은 광고회사와 영화회사 경력으로 어떻게 영상을 구성하고 스토리보드 만드는 법은 알고 있었지만, 편집하는 방법은 몰랐다. 기술만 배운다면 어떻게든 스스로 영상을 완성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내가 배우면 되지 뭐. 전문가들을 소개해주는 어플에 ‘영상 편집’으로 요청을 올리자 하루 사이에 여러 사람들이 견적과 커리큘럼을 올렸다. 호진은 가장 성실한 제안을 해온 ‘안프로’라는 강사를 선택했다.

‘안프로’도 기억에 남는 프리랜서였다. 작은 규모의 영상 제작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부업으로 자신의 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강의 일정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밤 11시에 강의가 진행된 적도 있었다. 이 강의 역시 비대면으로 줌을 통해 진행되었는데, 오히려 더 좋았다. 프로그램의 기능을 익히는 강의였기에 메뉴와 조작 방법이 화면에 보이는 것이 더 이해가 빨랐으며 강의 녹화가 가능해 복습하기에도 용이했다. 안프로는 호진을 모범생이라며 놀라워했다. 호진은 절박함 때문이라고 답했다. 수강생 대부분은 ‘유튜브나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에 수업을 들었고, 진도를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안프로는 말했다. 호진은 강의 영상 녹화본을 다시 돌려보며 자신만의 메뉴얼을 정리하며 복습했고, 관련 서적을 구입해 다음 주 강의에 해당되는 내용을 미리 예습했다. 배운 내용을 가지고 바로 영상을 만들어 매장에 틀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었기에 허투루 배울 수 없었다. 덕분에 한 달 만에 ‘영상 제작’이라는 기술을 하나 갖출 수 있었다.

언젠가는 호진도 프리랜서의 길을 걸어야만 할 것이다. 멀지 않은 때, 호진 역시 ‘그만둠을 당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그가 만난 인상적인 프리랜서들처럼 호진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에너지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는 강사처럼 호진은 ‘홀로 살아가는 에너지’를 갖출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아직은 먼 일이라고 고개 돌리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다가올 미래를 똑바로 직시할 것. 눈을 돌리지 않으는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강의 마지막 즈음에 호진이 질문을 받았다. 강의에서 느낀 점을 강사가 물어왔다.

“사실 오늘 강의 처음에는 시큰둥했습니다. 제게 고민은 에너지가 아니라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살아 남느냐였거든요”

강의 초만 화면에 나타난 호진의 표정은 그래 보였다고 강사는 말했다. 하지만 지금 호진님의 표정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소그룹에서 짧은 토론을 통해 나이 어린 동료들이 보여준 희망과 각오, 도전의 기운에서 자신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호진은 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강사님의 모습에서 많이 배우고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당신 자체가 오늘 강의 주제를 보여주네요. 고맙습니다. 용기를 얻었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앞으로도 늘 그 밝은 모습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소설] 팀장 호진씨의 일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디페시 모드의 그녀  (0) 2021.08.28
My Generation  (1) 2021.08.24
기획서와 자료  (0) 2021.08.20
여보게, 흰소리 그만하고 어여 짚신이나 꼬게  (0) 2021.08.10
Golden Slumber  (0) 2021.08.06
최근에 올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