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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 환자에겐 더운 날씨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추석을 앞둔 주말이었으나 지하철역 밖으로 나오자 한여름처럼 후끈했다. 거의 십 년 만의 홍대 입구였다. 풍경은 시간이 흐른 만큼 변했다. 출구 앞에서 상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은 사라졌으나 한껏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무리 지어 움직이는 모습만은 여전했다. 스냅 백이라도 쓰고 올걸. 아저씨처럼 보이는 자신의 모양새가 영 어색했다. 괜히 재경이 형하고 여기 오자고 했나. 며칠 전의 약속이 후회됐다. 형 힘들 거 같으면 다음에 보자고 메신저를 보냈다. 막 전철 탔어. 벌써 도착한 거? 답장이 바로 왔다.

 

“농담치곤 심한데. 그게 내 앞에서 할 소리냐? 일주일마다 두 번 투석 받는 사람 앞에서?” 재경은 주사 흔적으로 부어있는 팔뚝을 현준에게 내밀었다. “나 시한부야. 그런데 팔 년 시한부다. 딱 쉰 살 되면 난 죽을 거야”라는 현준의 말 때문이었다. 친형제처럼 지냈던 재경이었기에 하소연하고 싶었다. 힘들다고 말한다는 것이 소주 한 병을 넘기고 나니 과장이 심했다고 현준은 후회했다. “살기가 싫어졌어? 사는 의미가 없어?” 누그러진 듯한 재경의 말투에 현준은 안주를 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에서 난 투명 인간이야. 애는 엄마하고 딱 붙어있고. 집에서 말 한마디 안 한 지 몇 달 됐어” 현준의 빈 잔을 채우며 재경이 물었다. “회사는? 너 예전에 꽤 인정받지 않았나?” 몇 년 전 다니던 전 직장 이야기였다. 괜히 옮겼다는 생각에 현준은 출근길이면 가슴이 답답했다. 온라인 기업답지 않게 생각보다 텃세가 심했고 나이 어린 동료들에게 고개 숙이고 들어갈 때면 정수리 부근이 뜨거워졌다.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전성기가 엊그제 같은데. 현준의 한숨 섞인 한탄에 재경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주말이면 홍대에서 살았던 때가 전성기라는 그 얘기냐? 난 근처도 가본 적 없으니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나” 정말이냐고. 홍대를 안 가봤다는 게 말이 되냐고. 인생 헛살았다는 현준의 호들갑은 이번 주말에 꼭 가보자는 제안으로 이어졌다. 투어 시켜주겠다는 현준의 우격다짐에 재경은 마지못해 승낙하는 척했다. 현준은 재경의 스마트폰을 뺏어 캘린더 앱을 열고 토요일 오후 두 시에 홍대라고 메모를 입력했다.

 

맛있네. 아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오랜만이었다. 대답을 원한 것 같지는 않았다. 현준이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나오니 아내와 아들이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세 식구가 함께 식사한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아들의 입가에 갈색 양념이 묻어 있었다. 식탁에는 명절을 맞아 현준이 만든 갈비찜이 놓여 있었다. 어제 만들어 놓고 간이 잘 들었나 한 점 먹어보고 식힌 다음 냉장고에 넣어 놓은 것을 꺼내 데운 듯했다. 

 

현준은 추석 연휴 후 집을 나갈 생각이었다. 회사 근처 원룸은 석 달 계약도 가능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명절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현준은 뜬금없이 갈비찜이 떠올랐다. 기왕 만드는 거 넉넉하게 해서 양가 부모님께도 가져다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를 따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핏물을 빼고 데친 다음 양념장을 만든 후 익히는 데까지 사흘이 걸렸다. 딸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셨음에도 내색하지 않는 처가에 보낼 갈비는 더 실하고 살이 많은 것으로 골랐다. 밀폐 용기 뚜껑을 닫을 때는 마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봉하는 것 같았다. 양가에 가져갈 갈비찜은 따로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어 놓았다. 

 

응. 간이 잘 된 거 같아. 한입 가득 갈비를 입에 넣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으나 현준은 식탁 근처로 가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두 시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덥지 않겠어? 현준의 어깨를 툭 치며 재경이 말했다. 얇은 재킷을 걸친 현준에 비해 재경은 반소매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붉은빛이 섞인 푸르스름한 주사 자국이 양쪽 팔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어디 한번 안내해 보라는 말에 현준은 삼 층짜리 신발 매장이 있는 중앙 거리로 들어갔다. 길의 구조는 금세 기억이 났다. 클럽으로 가기 전 초저녁 반주를 위해 들리던 곱창집이 아직 있는지 궁금했다. 열 평 남짓한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후미진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 초입의 풍경이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없던 타로점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상하다, 여기가 아니었나? 현준이 당황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점집과 액세서리 가게를 지나 끝자리에 곱창집은 남아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은 닫혀 있었다. 저녁에 열면 여기서 한잔하자며 현준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기름기 가득한 초저녁 주말 냄새가 어디선가 묻어오는 듯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친구들은 팀장을 욕하면서도 아직은 회사에 대한 자부심에 가득 찬 신입사원들이었다. 자기가 어떤 일을 맡았고 어떻게 성장하고 있다는 자랑으로 이어졌다. 한두 잔 술이 들어가면 오늘 밤의 일정을 짰다. 어느 클럽을 먼저 가고 분위기를 보다가 어디로 옮겨가자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취한 것인지 이 밤에 대한 흥분으로 몸이 떨리는 것인지 헷갈렸다. 클럽들이 모여 있는 주차장 거리부터 삼거리 포차 사이의 공간에서 현준은 일종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는 또래 세대의 친구들과 하나 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중년이 된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금 여기의 젊은이들처럼 삶을 향한 흥분과 설렘을 뿜어내던 그 시절의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현준을 스쳐 가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그때의 풍경들이 신기루처럼 몽실댔다. 

 

형은 그때 신림동에 있었지. 곁에서 걷는 재경을 보며 현준은 생각했다. 둘은 대학 시절을 늘 함께했다. 재경과 여자친구의 백일에 맞춰 현준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축하 파티를 열어준 적도 있었다. 같은 학과도 아닌 둘이 가까워진 계기는 양담배였다. 신입생 수련회에서 복학생 선배에게 말보로 담배를 건넨 때부터 현준의 대학 생활은 기대와 달라지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담배를 부러뜨리며 시작된 우리 농민의 피와 땀 이야기를 현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학회 모임에 가슴에 성조기가 프린트된 옷을 입고 간 날 그 선배는 현준을 야, 말보로라고 불렀다. 어떻게 재경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지 현준은 기억나지 않았다. 전철 막차를 타기 전 학교 앞 모닝글로리에서 말보로 한 보루와 지포 라이터를 사서 현준에게 건네며 신경 쓰지 마, 나도 작년엔 그랬어. 무심한 듯 건넨 재경의 한 마디가 이십 년 넘게 이어온 둘 사이의 시작이었다. 

 

삼 학년부터 재경은 행정고시 준비를 시작했다. 현준이 졸업할 때 그의 신림동 생활은 이 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광고 회사에 취업한 현준은 주말이면 가끔 신림동을 찾았다. 혼자 삼겹살을 먹는 고시생들 사이에서 둘은 만취했다. 형이 안될 리가 없다고, 출세하면 술값 모아서 좋은데 한번 쏘라며 현준이 계산하곤 했다. 두 번의 일차 패스라는 성과를 남긴 채 서른을 갓 넘긴 재경은 십 년에 조금 모자란 고시 생활을 마쳤다. 

 

둘의 만남은 자주 연락 못 해 미안하다는 현준의 사과로 시작해서 학교 한번 가보자는 이야기로 끝나곤 했다. 정해진 터널을 지나는 선로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과거가 종착역인 이유는 서로의 세상이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다르게 기억되는 사실과 풍경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훌쩍 지났다. 당연히 즐거웠다. 또한 서글퍼졌다. 현준이 회사를 몇 번 옮기고,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으며 남들처럼 살아오는 동안 재경은 월세를 받는 임대 사업자가 됐다. 취업을 포기한 재경에게 그의 아버지는 일산에 원룸 다섯 개가 있는 다세대 건물을 마련해 줬다. 새어머니 사이에서 어린 동생이 태어났고 유산을 미리 받은 것일 뿐이라는 사연을 현준은 집들이에서 들었다. 술이 약한 편이 아닌 재경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많이 마셨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같은 당뇨 증세가 그에게 나타난 것은 일산에서의 생활이 채 일 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좀 쉬자. 재경이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는 힙합을 많이 틀던 클럽이었고 여기는 외국인이 많았다는 현준의 설명과 함께 홍대 거리 중심부를 한 바퀴 돌고 난 뒤였다. 마침 벤치로 둘러싸인 공터 중앙에서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기 앉자. 재경이 구석 벤치에 자리 잡은 뒤 현준은 걸어 나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역시 홍대는 홍대네. 옆길에서 폐지를 가득 실은 손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가 낡은 엑스 재팬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네모난 페인트 통에 꽁초를 넣고 벤치로 향하는 현준 왼편으로 한 여자가 재경이 있는 벤치를 향해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액슬 로즈 님이세요?” 여자와 현준이 나란히 서서 앉아있는 재경을 마주했다. 재경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고 현준은 옆의 여자를 잽싸게 훑어봤다. 이십 대 후반 정도 됐을까.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를 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동그란 안경테가 곧게 뻗은 콧날에 걸쳐 있었다. “액슬 로즈요? 그 건즈 앤 로지스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네, 당근 아이디 액슬 로즈 아니세요? 여기서 거래하기로 한 앨리스인데요” 당근이요? 재경이 뭔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 사이를 찌푸렸다. 순간 앨리스의 얼굴에 민망한 표정이 스쳤다. 실례했습니다. 뒤돌아 가는 그녀의 등에는 검은색 기타 케이스가 걸려있었다. 맞은편 벤치에 자리 잡은 앨리스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손가락을 바삐 놀렸다. 

 

“깜짝이야. 난 스카이러브인 줄 알았네. 하긴 진작 없어졌겠지만” 현준의 시선은 정면에 앉아있는 앨리스에게 꽂혀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여전히 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형 당근 몰라? 왜 있잖아. 중고거래하는 앱"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재경에게 현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요즘도 저걸 입는 사람이 있었네. 유행은 돌고 돈다더니. 앨리스는 가슴께에 미치코 런던 로고가 커다랗게 있는 하얀 반소매 티를 입고 있었다. 옆에 세워놓은 검은 케이스는 둥그런 모양을 한 것을 보니 통기타 같았다. 음악 하는 사람 분위기는 아니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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