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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우리 고등학교 때 여자애들 같지 않아?” 볼수록 그 시절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고 현준이 말했다. “나도 그 생각 하고 있었다. 하얀색 게스 천 가방 있잖아. 그거 메고 있으면 완전 딱이겠는데” 순간 앨리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고 현준과 눈을 마주쳤다.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걸어온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기타를 앞으로 내밀었다. “저기요. 이거 사실래요? 십오만 원에 내놓은 건데, 십사에 드릴게요”

 

”텄어요. 약속 시간 십 분 지나 못 오겠다고 메시지 왔네요. 참 나” 거래는 어떻게 됐냐는 현준의 질문에 앨리스가 말했다. 일이 재밌게 되어간다는 생각에 현준이 말할 거리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럽시다. 안 깎아줘도 돼요. 십오만 원에 살게요” 재경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잘 됐다! 정말 감사해요. 사실 오늘 꼭 팔아야 했거든요. 아. 잠시만요” 앨리스가 어깨에 걸쳐 맨 크로스백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순식간에 이뤄진 거래에 황당해진 현준의 눈앞에서 파란색의 네모난 물건이 지나갔다. 앨리스가 재경에게 건넨 것은 록그룹 너바나의 시디였다. “어, 네버 마인드네. 이야. 오랜만이다” 현준이 재경 손에 있던 시디를 가져와 신기하다는 듯 감탄했다. “이따가 음반들도 팔아야 해서 챙겨온 건데, 많이 산다고 해서 덤으로 주려던 거였어요. 그쪽이 더 고마우니까 줄게요”

 

“이 아가씨 완전 꾼이네. 주로 여기서 거래해요?” 현준은 가방 안에 또 어떤 음반들이 있나 궁금해졌다. “네. 집도 이 근처니까. 아저씨들은요? 엑스 세대 둘이 대낮부터 여기서 뭐해요?” 마치 여기는 당신들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듯 들렸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예전 추억 찾아 오랜만에 왔다는 현준의 답에 그러기엔 아직 어리지 않나, 앨리스가 혼잣말했다. 어리다는 말이 현준에게 어색하게 들렸다. “우리도 마땅히 할 게 없는데, 그쪽도 시간 괜찮으면 시원한 거나 같이 마실래요? 거기 안에 있는 것 구경시켜 주면 우리가 살게요” 앨리스는 중년은 취향이 아니라며 밉지 않은 미소로 거절했다. “시디 보고 싶으면 근처에 중고가게 있는데, 거기라도 구경하던가요. 키 큰 아저씨는 좋아할 것 같은데” 현준을 보며 말했다.

 

강남역 타워레코드 가는 기분인데. 앞서 걷는 앨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재경이 말했다. 왜 오늘 기타를 꼭 팔아야 하냐는 재경의 질문에 앨리스는 오늘까지 잔금 내기로 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재경은 인심 좋은 아저씨처럼 웃었다. 가게는 멀리 있지 않았다. 극동방송 맞은편 작은 길로 들어서자 중고 음반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앨리스는 손을 흔들었다. “자 그럼. 추억 여행 즐겁게 하세요. 작은 아저씨, 다시 한번 고마워요” 재경은 계단을 내려가며 오른손으로 등에 멘 기타를 툭툭 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웬만한 카페 크기는 되어 보였다. 아티스트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구분해 음반을 정리해 놓은 평대가 가득했다. 이런 풍경이 너무 오랜만이라 현준은 가슴이 뛰었다. A부터 한 번 훑어볼까 싶을 때 잠깐 화장실 갔다 온다며 재경이 기타를 맡기고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몇 개 골라서 사 가야 하나. 현준은 양손으로 세로로 진열된 음반을 넘기기 시작했다. C로 옮겨갈 때 즈음 재경이 돌아와 평대 옆에 세워둔 기타를 다시 등에 멨다. 현준은 고개를 숙인 채 플라스틱 시디 케이스를 뒤척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재경은 음반에는 관심이 없는 듯 매장을 한 번 둘러봤다. “사실 난 너랑 만나는 거 싫었어” 현준이 막 조이 디비전의 음반을 꺼내 들고 있을 때 재경이 곁에 섰다. “독서실에 처박혀 있을 때 넌 신나게 살았잖아. 가끔 네가 신림동으로 찾아와주는 거 반갑지가 않았어. 여자친구도 데려오고 그랬었지? 너 가고 나면 며칠은 공부가 안됐다” 현준은 빈 공간 아무 데나 음반을 밀어 넣었다. 재경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정면을 바라봤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의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붙기만 하면 못난 생각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다짐하며 털어내는 데 며칠 걸렸어. 결국은 실패했지. 새로운 걸 하려고 해도 이미 늦어있더라. 넌 애써 이것저것 찾아 헤맸지만 정작 남은 건 없다고 했잖아. 하지만 내 몇 배나 되는 삶을 산 거야” 미안했다는 말이 현준의 목에 걸린 채 나오지 않았다. “투석을 받는 데 반나절이 걸려. 그런 사람들이 침대 위에 죽 늘어서 있지. 그 시간 동안 뭐 하겠냐.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거지. 그런데 어쩌다 그 사람이 안 오기 시작하면 서로 말은 없어도 무슨 일인지 알아” 재경의 얕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네가 시한부라고 한 말이 얼마나 웃겼는지 알겠지” 재경은 어제 유언장 공증을 친구 변호사에게 맡겼다고 말을 이었다. “얼마 안 되지만 가만 놔두면 쪼개져서 그 여자 아들한테까지 가는 걸 도저히 못 참겠더라. 조카한테 다 준다고 했어. 우리 형 딸내미. 한 번 봤었지” 현준은 재경 어머니 빈소를 같이 지키며 봤던 꼬맹이가 기억났다. 지금은 많이 컸겠지. 긴 침묵이 이어졌다. 자신이 말할 차례인 것 같았으나 현준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재경 쪽으로 몸을 돌릴 때 재경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현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약 먹을 시간이다. 나가서 생수 사 오겠다며 계단을 올라갔다. 

 

재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멍한 채 기계적으로 음반을 하나씩 뒤적이던 현준은 Z 코너까지 끝난 뒤에야 그가 없음을 눈치챘다. 형 어디야. 메시지를 남겼지만 스마트폰 화면의 1은 없어지지 않았다. 가게 밖으로 나오며 전화를 걸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잠시 후 메신저 알림 창이 떴다. ‘오늘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어’ 짧은 메시지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죄책감을 덮으려는 듯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양반이 기타까지 메고 이 날씨에 어딜 간 거야. 홍대를 떠났다고 해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집에 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현준은 걸음을 빨리했다. 유언이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몸을 움직여야 했다.

 

현준은 걸어온 길을 거슬러 가며 등에 기타를 메고 있는 남자를 찾았다. 예전에는 홍대에서 기타가 꽤 보였으나 이제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자취를 감춘 듯했다. 앨리스와 만났던 공터 근처를 지날 때 십여 미터 앞에서 검은색 기타 케이스가 현준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현준은 서둘러 뒤를 쫓았다. 인파에 묻혀 누구인지 알아보기엔 어려웠고 사람들 사이로 기타의 머리 부분만 보였다.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접근했을 때였다. 머리를 파란색으로 염색한 남자임을 알아채고 기운이 빠진 현준 앞에 눈에 익은 풍경이 나타났다. 가로수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노천 테이블이 있는 아담한 카페들이 줄지어 있는 도로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현준은 오래전 여기에서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디페시 모드 듣고 있었나 봐요”

 

맞은편에 앉으며 아내는 인사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MP3 플레이어를 가리켰다. 소개팅 시간에 일찍 도착한 현준이 듣고 있던 곡이 조그만 모니터에 띄워져 있었다. 전성기를 한참 지난 신스팝 밴드 이름을 꺼낸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날 그녀가 보여준 모습과 표정을 현준은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겨울비가 보드랍게 내리던 초겨울이었다. 그리 춥지 않던 날씨에 옷차림은 계절에 비해 가벼웠다. 검은색 스키니진에 회색 라운드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머리는 자연스러운 웨이브가 있었다. 약간 푸른 기운이 있는 색으로 눈 주변에 화장을 했다. 참 예쁘다고 현준은 생각했다. 사실 팻 숍 보이즈를 더 좋아하는데요. 현준도 첫인사 대신 답했다.

 

엄마는 아빠가 너무 재미있어서 좋았어. 처음 만난 날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몰라. 현준이 떠올리는 그날 아내는 많이 웃었다. 낭랑하게 울리던 웃음소리가 선명했다. 그녀가 웃을수록 더 잘 보이고 싶었다. 가만히 있으면 차가워 보일 수 있는 인상의 여자가 현준을 바라보며 웃음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쳐 주는 것이 좋았다. 별것 아닌 회사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도 뭐가 그리 웃겼을까.

 

아내는 가로수가 많은 이곳을 홍로수길이라고 불렀다. 짧은 연애 시기와 신혼 초기엔 카페를 옮겨 다니며 책을 읽거나 종이에 낙서를 하고 놀았다. 아들이 태어나고 이년 뒤 집을 샀다. 무리한 대출로 다소 부담되는 동네의 아파트를 고른 것은 아내였고 가파르게 오르는 집값에 자신의 선택을 뿌듯해했다.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 친구 엄마들과 어울리면서 아내가 전하는 이야기를 언제부턴가 현준은 피하기 시작했다. 직장인 남편은 현준뿐이었다. 누구네는 에비앙 생수를 박스로 배달시켜 마신대. 겨울이면 스위스로 스키 타러 간다네. 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현준은 재테크를 시작했으나 재능도 운도 없었다. 버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았다. 용돈을 더 아끼기 시작했다. 월급에서 최대한 많은 돈을 아내에게 주려던 모습이 궁상으로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여러 차례 큰 싸움을 거치고 각방을 쓰기 시작한 뒤였다.

 

그 카페가 아직 있을까.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 아이스티를 시키는 현준을 촌스럽다고 놀리던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갈증이 느껴졌다. 피곤이 밀려오며 현준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발걸음에 맞춰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선명했다. 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낙엽이 밟히는 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머리 위에 노랗고 붉은 나뭇잎이 가득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구월이지만 아직 한여름 날씨였다. 줄지어 늘어선 푸른 잎의 다른 가로수들과 달리 유독 이 나무만 혼자 앞서 가을 색을 지니고 있었다. 현준은 발뒤꿈치를 들고 팔을 뻗어 가지 끝에 걸린 서너 잎을 따서 손바닥 위에 놓고 가만히 들여다봤다. 푸른 나이의 젊은이들이 가득한 이곳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의 모습 같았다. “뭐해요. 나무에 뭐가 있어요?” 현준은 환청인 줄 알았다. 아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손에 든 앨리스가 앞에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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