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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어록 번호를 입력하기 전에 벨을 누른다. 아내와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집 앞에 왔다는 걸, 곧 들어간다는 걸 벨소리로 알린다. 그러면 서로 마주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할 말은 뻔했다.
왔어? 응. 밥은? 내가 대충 챙겨 먹을게.
누가 먼저 왔느냐에 따라 묻고 답하는 순서만 다를 뿐이다. 마주하고 식탁에 앉지 않는다. 거실에 햇빛이 들어오는 날에는 TV 위에 쌓인 먼지가 보인다. 곧 서로의 방은 닫히고 각자의 밤을 보낸다.
나는 방에서 강의 준비를 하거나 학생들의 리포트를 채점한다. 브랜드 수업을 주로 맡아서인지 새로운 사례가 많다. 불과 몇 년 전에 잘나가던 스타트업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정말이지 피곤한 전공을 골랐어. 옛날 교수들은 한 교재로 십 년도 버텼는데, 우린 이게 뭐냐. 트렌드 헌터도 아니고.”
동료 부교수인 동훈은 회계나 재무를 해야 했다며 매번 투덜댄 후 말을 더했다.
“너도 이제 그만 멍하게 있어. 예전에는 제일 빠르던 애가 왜 그래.”
걱정해 주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날카로움을 모르지 않았다. 늘 작은 한숨으로 대신하곤 했다.
“경아 엄마, 아니 미안하다. 지수는 잘 있어?” 동훈이 자신의 말에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응. 뭐, 그렇지. 팀장 달고 나서는 엄청 바빠. 얼굴도 잘 못 봐” 못 들은 척했다.
석사 할 때 셋이 자주 어울려 다녔다. 나와 동훈이 박사 과정으로 유학을 택했을 때 아내는 공부를 그만두고 광고 회사에 입사했다.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성격에 무슨 광고 회사인지 싶었다. 브랜드 전략을 주로 짜는, 연구원하고 비슷한 일이라서 괜찮다고 했다. 요즘은 일에 더욱 몰두하는 듯, 늦게까지 노트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살짝 열린 문밖으로 들렸다. 동훈이 아내의 근황을 자세히 물었어도 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 못한 채 몇 년이 지났다, 둘이 같이 사는 집에서.
딸에게 그 일이 일어난 후부터였다. 갑자기 닥친 일이었다. 남겨진 우리도 무방비 상태에서 사고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셋이었던 공간에 둘만 남았다. 깊은 슬픔에 사로잡힌 채 서로 위로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후로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자동차 보험이 다 됐다는 문자를 받은 때였다.
“연식도 얼마 안 된 차인데, 낮은 가격에 내놓으셨네요. 사고 이력 있는 건 아니죠?”
중고차 앱에 올린 지 하루 만에 찾아온 사람은 의심쩍은 표정으로 차를 둘러봤다.
“사정이 있어서요”
애써 차에서 눈을 떼고 있던 나는 대답하면서 무심결에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문 안에는 경아와 함께 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 과자 봉지가 떨어져 있었다. 계기판 중앙에 꽂힌 고양이 캐릭터 USB에 눈길이 갔을 때 아이가 좋아하던 동요가 들려왔다.
“이제 그 정도 됐으면 마치시죠”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할까요?”
트렁크에 카시트가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경아가 앉기 싫어해 넣어 놨었다. 그냥 가져가 주세요,라고 말한 것까지 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차가 떠난 빈 주차장에서 나는 USB를 꽉 쥔 주먹을 가슴에 대고 웅크린 채 오열했다.
일 년에 하루는 차를 렌트했다. 운전은 아내가 했다. 공원묘지는 멀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은 세 번 모두 막혔다. 오가는 길의 드문 대화 중에도 경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서먹하진 않지만 친근하지도 않은, 반투명 비닐 봉지에 둘러쌓인 듯한 이야기가 오갔을 뿐이다. 막히는 도로에서 시간을 흘릴 뿐인 용도의 대화였다.
“그날 경아가 뭘 입었지?”
첫 기일에 딸아이 사진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던 중에 아내가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신이 아침에 챙겨주던 날이었잖아. 하지만 그걸 가지고 당신한테 뭐라고 하는 건 아니야”
잊었다는 죄책감에 아무것도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그날의 내가 미워서 그래. 엄마가 돼서 딸 머리도 제대로 빗겨주지 못한 내가 싫어서 그래. 다른 애들처럼 엄마손 잡고 학교며 학원이며 가보지 못한 경아한테 미안해서 그래.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아내가 무너진 건 그날뿐이었다. 두 번째부터는 우리 딸 잘 있었니. 사진에 손을 한 번 대고는 돌아왔다. 함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만 어디 들렀다 갈게. 나는 동네 술집에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 오늘은 좀 나와
- 싫다니까. 세미나 준비해야 돼
- 아직 이주나 남았잖아. 내가 나중에 도와줄게 오늘은 그냥 째
- 아니 정말 됐어
메신저 대화 후 몇 초 지나지 않아 동훈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바로 옆에 연구실 있으면서 무슨 전화야”
“컴퓨터 끄라고 말하려고. 나 지금 일어난다. 바로 네 방으로 갈 테니까 너도 준비해”
문 앞에서 버티고 있는 녀석에게 끌려간 곳은 가로수길에 오픈한 안테나숍이었다. 최근 트렌드를 파악하려면 스타트업들과도 어울려야 한다는 동훈은 곧잘 그쪽 사람들과 어울렸다. 몇 번이고 나를 데려가려는 걸 거절해 오다가 오늘은 꼼짝없이 잡혀 나왔다.
“여기가 이번에 시리즈 A까지 성공한 비건 버거를 창업하신 대표님이야. 잘 계셨죠 대표님?”
종업원으로 보였던 여자에게 동훈이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흰 티셔츠에 헐렁한 반바지의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인사하며 가만히 보니 꽤 매력적인 외모였다.
“같이 오실 거라고 이야기 들었어요. 같은 학교 교수님이시라고요? 언제 시간 되실 때 저희 회사 컨설팅도 부탁드려요”
“아니 대표님, 언젠가는 나만 믿는다더니 바로 이렇게 노선 갈아타기 있어요? 하하”
동훈은 닭꼬치를 뜯으며 소주 잔을 내밀었다.
“거기 사람들하고 같이 가지 왜 나랑 궁상떨고 있냐?”
“너만 빼고 어떻게 가냐. 그리고 너 데리고 가면 엄청 부담느낄 거잖아. 그럼 다음부턴 안 따라올 거 같아서”
술을 입에 털어 넣고 빙긋 웃는 동훈의 마음 씀씀이가 새삼 고마웠다. 녀석은 늘 그랬다. 아직 싱글이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아서였지, 늘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어울렸고 여자들과도 많이 사귀었다. 서로 호감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아내와 나를 이어준 것도 동훈이었다.
“지수하고는 어때? 여전히 보고도 못 본 척 그렇게 사냐?”
뭐 그렇지. 작게 답하고 손가락으로 잔을 돌리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동훈이 말했다.
“너 헤어질거야? 이제 지수랑 그만하고 싶어?”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순간 팔에 힘이 들어가 소주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이제 그만 경아는 보내줘. 그러다가 너네까지 망가져. 난 그게 더 겁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래서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어”
“그래. 너랑 지수랑 그런 면에서는 꼭 닮았으니까. 있잖냐. 그럴 땐 생각하지 말고 그냥 서로 눈 보면서 이야기하는 거야. 아파도 그래야 돼. 퓨즈가 끊어질 때까지 경아 이야기를 해. 그래야 문이 열려. 누군가는 먼저 벨을 눌러야 되는 거야”
동훈과 헤어지고 집에 오니 열두 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아내는 집에 있을 테지만 벨을 누르지 않았다.
“왔어? 동훈이 만났다면서”
아내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당신하고 헤어지고 전화했더라고. 엄청 취했으니 자지 말고 챙겨주라고. 그런데 멀쩡하네 뭐”
오늘 바로 아내와 이야기하라고. 나하고 약속하라고 새끼손가락을 내밀던 녀석이 생각났다. 이건 조금 오버다, 인마.
“걔 원래 그렇잖아. 오지랖 넓고”
“그래도 오랜만에 목소리 들었네. 동훈이 잘 있어? 아직도 혼자야?”
“오히려 즐기는 거 같던데? 자유로운 영혼이야, 아직”
낮에 만났던 대표와도 그냥 비즈니스 사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서로 대화할 때 어깨를 살짝 치는 등의 제스처에서 오는 느낌이 있었다. 오늘 저녁은 빠지겠다는 동훈의 말에 유난히 서운해하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금 기억났다.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신 술 마시고 온 거 오랜만에 보네”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응. 맥주 한 잔할래?”
술 마시고 와서 할 말은 아니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내가 피식 웃었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 조명 아래 얼굴에 아직 미소가 살짝 남아있었다. 그쪽으로 손을 가만히 내밀었다.
“있잖아. 지수야”
“늦었다. 냉장고에 케일 주스 만들어 놨어. 내일 아침에 마셔”
아내는 급하게 일어나며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벨이 고장 났어. 아까 눌러보니 안되던데. 당신이 봐 줄 수 있어?”
“그럴게. 마침 내일 강의 없는 날이야”
나는 민망한 기분을 추스르며 식탁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요즘은 아내보다 내가 먼저 집에 왔기 때문에 벨이 고장 난 줄 모르고 있었다.
- 마법 같은 벨 소리. 당일 설치 가능합니다
집수리 매칭 앱을 뒤적이던 중 눈에 걸리는 문구였다. 최저가 보장, 6개월 사후 서비스 등으로만 이어지는 페이지에서 어울리지 않기에 더 튀어 보였다. 카피 잘 썼네. 시공 업계에서도 마케팅의 힘은 작동하고 있었다. 어차피 벨 교체는 그게 그거일 터였다. 더 찾기도 귀찮아서 몇 번의 클릭으로 그 시공업자에게 설치 요청을 마쳤다.
“네 사장님, 앱으로 요청하신 사람입니다. 언제 방문 드릴까요?”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라면 한 그릇을 막 먹었을 때 전화가 왔다. 아파트 동호수는 이미 등록을 했다. 지금도 가능하다고 하니 한 시간 후면 도착한다고 했다.
“사장님, 이제 엘리베이터 탑니다”
사십 분 조금 지나서 전화가 왔다. 벨이 작동하지 않으니 밖으로 나와 있으라는 말인가. 문을 손으로 두드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문을 열고 말발굽 스토퍼로 고정시킬 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수리 기사가 나왔다. 처음 봤을 때는 이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일 센티 정도 됐을 길이의 스킨헤드와 구레나룻부터 이어진 턱수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심하게 관리하는 게 분명한 듯 일정한 길이의 털은 머리부터 턱까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농구팀 반팔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는 그는 내게 헤이 요,라고 인사할 것만 같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도시 근처의 팀이었기에 유학 시절 몇 번 구장을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스쳐 지나던 흑인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서비스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깍듯이 구십 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는 그에게 나도 모르게 하이파이브 하려 올리던 손을 내렸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걸음걸이 또한 힙합의 그것이 아니었다. 다소곳하게 발걸음을 옮겨 벨 앞으로 가서 몇 번 눌러보더니 나를 보며 물었다.
“음. 한 번 뜯어보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전동드릴을 몇 번 돌렸다. 벨 기판의 안쪽 면을 찬찬히 살펴보던 그는 가져온 가방에서 바늘 같은 핀이 달린 케이블과 노트북을 꺼냈다. 최신형 맥북 프로였다. 사고 싶었지만 가격 때문에 포기한 모델이었다.
그는 의사가 환자 가슴에 청진기 대듯이 바늘로 기판의 부속 곳곳을 훑어나갔다. 맥북 화면에는 녹색의 전기 파동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원래 벨 교체는 고장 난 걸 떼어내고 새 걸로 갈아끼면 끝나는 거 아닌가. 이건 무슨 퍼포먼스인가. 하지만 너무도 진중한 그 행위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벨에도 수명이란 게 있습니다. 수명이 다 되면 멈추는 게 당연하지요”
골똘한 표정으로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집은 너무 일찍 왔는데요. 한 7년 되셨죠?”
딸아이 유치원 들어갈 때 이사온 집이었다. 신축 단지였으니 새 벨이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년도를 계산해보니 딱 2개월 모자란 7년이었다.
“벨을 너무 많이 눌러서 그런 건가요?”
맞는다는 말을 못 하고 그에게 되물었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 어디 한 번 더 맞춰봐라, 질문을 던지는 기분이었다. 단둘이 사는 집이었다. 딸아이가 떠난 후로는 집을 찾아온 사람도 드물었다.
“아닙니다. 벨을 누를 때의 감정에 따라 기간이 급속히 짧아지는 경우가 많죠”
“감정이요? 사람의 기분, 영어로 센티먼트를 말하는 건가요?”
“네. 많이 모르시지만, 벨은 사람 사이의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눈동자가 맑다고 생각했다. 너무 빤히 쳐다봐서 나는 눈을 피했다.
“문밖에 있는 사람이 벨을 누른다는 건,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는 겁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왔어. 너를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마음을 전하는 거죠. 그리고 그 벨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자신을 원하는 상대를 맞이하는 순간을 만드는 게 벨입니다”
나도 모르게 허, 하고 한숨이 나왔다. 십분이면 끝날 거라 생각한 벨 교체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다. 그는 빙긋 웃으며 새 기판을 가방에서 꺼냈다.
“이 벨을 달면 좋아질 거예요. 벨 소리도, 사장님도”
“좋아져요?”
이제 캐물을 마음은 사라졌다. 궁금함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이 청년이 이어갈 말에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
“이 벨은 누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소리가 달라집니다. 행복한 이가 누르면 그 마음이 안에 있는 사람에게 전해지지요. 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너와 함께 나누고 싶어,라는 마음이 상대의 귀에 들려요”
그는 벨을 살짝 누르는 시늉을 하며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반대도 있다는 거겠군요”
“그럼요. 슬프고 화가 난 마음도 벨을 통해 전해지죠. 하지만 그 경우에는 날 위로해 줘. 너에게 기대고 싶어. 이런 벨 소리가 나죠. 내 나쁜 기분을 상대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건, 누구에게도 좋을 리가 없으니까요”
설치 기사는 기판을 꺼내 네 귀퉁이에 나사를 하나씩 전동 드릴로 돌리기 시작했다. 왼쪽 아랫부분 마지막 구멍이 남았을 때 그가 말했다.
“자. 이제 마지막이 중요해요. 이 나사를 집주인이 직접 결착 시키는 겁니다”
헛웃음이 나왔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마지막까지 속는 셈 치고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전동 드릴을 바라봤다.
“아니요. 이걸로 돌리셔야 합니다” 사내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촌스러운 무지개색 패턴이 새겨진 드라이버를 내밀었다. 군데군데 기름때가 베인 지저분한 것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걸 받아든 내게 그가 말했다.
“이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세요. 그들에 대한 사장님의 마음을 계속 떠올리세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사를 구멍에 집어넣는다. 달칵. 나사가 걸린다. 나사 코에 십자 드라이버를 맞춘 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리기 시작한다. 경아는 팔을 잔뜩 올려도 벨에 손이 닿지 않는다. 내가 웃으며 뒤에서 안아 올려주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딸아이는 벨을 누른다. 드라이버를 다시 돌린다. 처음 이사 온 날, 아내는 도어록 번호를 입력하기 전에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해야지. 그녀가 벨을 누를 때 내 오른팔에 안긴 딸이 손뼉을 친다. 이제 나사가 고정되기 시작한다. 마지막 한 바퀴를 힘주어 돌린다. 딸은 도어록 번호를 외우지 못해 이번에도 실수한다. 아내가 웃으며 번호를 하나씩 누르며 가르쳐 준다. 영. 오. 영. 삼. 일. 이. 엄마랑 아빠랑 처음 만난 날이야. 드라이버를 나사에서 떼어낸다. 나는 울고 있다.
드라이버를 손에 쥔 채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 우는 동안 설치 기사는 장비를 백팩에 다시 넣은 뒤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도 공손하게 손을 모아 드라이버를 그에게 건넸다.
“소중하게 쓰세요. 대금 지불은 온라인 송금 가능하실까요?”
담백한 마무리였다. 모바일 송금은 금세 끝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와 나는 말이 없었다. 문이 닫힐 때 서로 살짝 웃었다. 그는 눈동자처럼 맑은 미소를 보여줬다.
소파에 앉아 한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벨을 누르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나야. 벨 새로 달았어. 그런데, 뭐라고 말해야 하나. 독특했어”
나는 설치 기사의 외모부터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급하게 메일 보낼게 하나 있는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도 될까?”
“아, 미안”
“아니야. 당신하고 전화로 이야기하는 거, 오랜만이네”
“그런가. 오늘 일찍 와? 집에 오면 더 이야기해줄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래. 갈 때 뭐 좀 사갈까? 아내의 말에 맥주 몇 캔 만 이라고 답했다. 통화를 마치고 뭐라도 준비할까 싶어 냉장고를 뒤적였다. 냉동실의 슬라이스 연어를 해동시키는 동안 마늘을 잘게 썰었다. 파스타면을 삶으면서도 온 신경은 귀에 쏠려 있었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 너머 뭐가 들려올까.
아내가 왔다. 벨 소리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하려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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