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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은이 앞에 있다는 사실을 한나는 아직 머릿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절 공원의 풍경과, 함께 앉았던 벤치와, 귓가로 들리던 새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어머, 얘 좀 봐. 벌써 나 잊어버린 거야?”

 

그 사이에 언니 목소리가 더 커진 것 같네. 이제서야 혜은을 실감한 한나는 그녀의 미소를 따라 빙긋 웃어버렸다.

 

잠깐 괜찮아? 근처에 일 있어서 왔다가 한나 보러 온 건데

그럼요. 과장님 좋아하는 허니 레몬티로 드릴까요?”

아직 기억해 줘서 고맙네. , 그걸로 부탁할게

혜은이 메고 있던 백팩에서 카드를 꺼내려 하자 한나가 만류했다.

저 보러 왔다면서 무슨 계산이에요. 2층 좌석에 올라가 계세요. 바로 가지고 갈게요

 

카운터 옆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직원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음료를 만드는 매니저가 과연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 방금 손님을 대할 때의 표정과 말투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그 차가운 강한나 매니저가 안경을 벗었다고 성격이 바뀐 건가? 대체 저 손님은 누구기에 얼음 같던 인간을 웃게 만든 거지?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혜은은 음료를 들고 온 한나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말 걸기가 계면쩍어 역시 조용히 앉아있던 한나가 먼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예요. 과장님. 무슨 말이라도 하세요. 계속 쳐다만 보고

정말 많이 변했네. 놀라워

진심으로 감탄하는 듯한 혜은의 표정에 부끄러워진 한나는 습관처럼 안경테를 올리려 했으나, 오늘은 렌즈를 끼고 와서 손가락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있잖아. 나 한나랑 그렇게 오래 같이 있으면서 안경 벗은 거 첨 본다. 그 두꺼운 안경으로 미모를 감추고 있었구나. 아깝게도

 

혜은은 4년 전에 비해 조금 더 살이 붙어 보였고, 훨씬 자연스러워진 분위기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게 치마 정장을 갖춰 입던 혜은이었다. 지금은 넉넉한 사이즈의 체크무늬 셔츠가 잘 어울렸다. 물이 살짝 빠진 듯한 면바지에 스니커 차림이 한나의 눈에는 혜은 또한 많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과장님이 그때 한 말 있잖아요

얘는 아직도 계속, 과장님이 뭐야

? 그럼…”

그냥 언니라고 해. 혜은 언니

마음속으로는 수도 없이 언니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부르고 싶었지만 막상 한나는 그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현장에서 사람을 담아보라고,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요?”

당연하지. 그것 때문에 왔는데. 잘되어 가고 있나 확인하려고. 후후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혜은의 시선을, 한나는 피하지 않았다.

 

아직 못 담았어요. 솔직히는, 뭘 담으라는 건지 아직 제대로 이해 못 했다는 게 더 솔직한 고백이겠죠

푸하하. 순간 혜은이 내뱉은 큰 웃음소리가 매장에 울려 퍼졌다.

당연하지. 그걸 이 짧은 시간에 담는 건 반칙이야. 세상 누가 그렇게 하면서 살겠니?”

 

예전처럼 자기의 투정에 다정하게 격려해 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못할 줄 알았다는 듯, 농담처럼 받아넘기는 혜은의 태도가 한나는 야속했다. 확실히 이 언니는 변했구나. 실망한 마음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매니저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매장의 선임급 직원이 한나 쪽으로 서류를 들고 와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좀 급하게 이걸 처리해야 하는데요. 제가 어떻게 하는지 잘 몰라서

 

한나는 서류를 건네 들고 잠시 살펴보더니 과장님. 잠시만요라고 말한 후 옆 테이블로 옮겨 그 직원과 마주 앉았다. “이 건은 말이죠. 여기 이게 포인트거든. , 이렇게 설명하는 게 낫겠다한나는 자기 다이어리를 펼쳐서 종이 한 장을 찢어 그 위에 무언가를 그리면서 직원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것 봐. 이제 이해되죠?” 한나가 씽긋 웃자 상대방도 아하, 그렇군요라며 방금 전의 난처한 표정 대신 안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혜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죄송해요. 조금 급한 일이어서

됐어! 말로 안 해도 담았네. 한나 마음에 벌써 많이 담겼어

네 갑자기 그게 무슨?”

, 나 한나한테 이거 주려고 왔어

혜은이 옆에 놓은 백팩에서 티켓 몇 장을 꺼내 한나에게 건넸다.

 

근처 갤러리에서 전시회 열거든, 다음 주부터

전시회요? 미술이요?”

한나가 티켓을 들여다본 후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몰랐어? 나 미대 나왔어. 그림쟁이 꿈을 가진 채로, 팔자에도 없는 회계를 십 년이나 한 거야. 웃기지?”

 

혜은의 폭소에 뒤이어 한나의 웃음도 터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눈물을 흘려가며 한참을 웃었다.

 

뭘 이런 걸로 본사까지 부르고 난리야

갑작스러운 본사의 호출로 잔뜩 긴장했던 영빈은 안심 반, 짜증 반의 기분으로 매장으로 복귀 중이었다. 자신을 포함한 10명 남짓한 점장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수도권 내 주요 점장과의 간담회였다. 명목과는 달리 실상은 영업 본부장이 심심해서 만든 급조된 행사라는걸, 간담회가 시작된 지 10분도 되지 않아 참석자가 모두가 알아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나저나 하루가 벌써 끝나가네영빈이 카페 토라세 방배점에 도착할 즈음, 종일 흐렸던 하늘 사이로 오후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평소대로라면 강 매니저한테 매장 사무실로 끌려가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느냐, 시달렸을 텐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영빈이 2층 매장으로 올라가자 두 명의 여자가 앉아 있는 창가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비어 있었다. 그들은 어깨가 닿을 듯 붙어서 앉은 채 무언가를 바라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웃고 있었다. 뒤편의 창을 통해 매장으로 들어온 따스한 빛이 그들을 감싸주고 있었다.

 

마치 어느 공원의 벤치 같구나. 영빈은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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