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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식은 없기를 바랐는데. 조금 늦게 도착한 족발집에 조영욱이 있었다. 몇 안 남은 회사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이니 녀석이 빠질 리 없지만, 오늘은 또 무슨 꼬투리로 이죽거릴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술맛이 떨어졌다.
“이야. 역시 유영빈이야. 현장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최우수 매장 포상도 받고”
“야, 그냥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라. 넌 영빈이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냐”
“칭찬하는 건데? 너, 옛날처럼 볼드모트로 변한 건 아니지? 주변 사람들 쥐어짜서 성과 만드는 게 네 특기잖아?”
이 자식이. 한 마디 쏘아붙이려 할 때였다. 인사팀 정지호가 “야야. 오랜만에 만나서 왜들 그래. 한잔하자”라며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영빈이 이제 변한 거 알잖아. 방배점 분위기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쥐어짜긴 뭘 쥐어짜냐”
“지호 말이 맞아. 방배점에 걔가 있는데, 점장이 갈군다고 콧방귀나 뀌겠냐”
“방배점에? 누구?”
“어, 이름이 뭐였더라. 그 있잖아. 강철 여전사, 회계팀에서 쫓겨난”
동기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강한나. 걔 장난 아니지”
그새를 못 참고 조영욱이 재수 없는 말투로 한 마디 보탰다.
“볼드모트와 강철 여전사의 뜨거운 결투가 시작된다! 무슨 영화 예고편 같네”
볼드모트. 사악한 최종 보스. 마케팅팀에 있을 때 별명이었다. 일 잘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주변에 적도 많았고, 어쩌다 보니 회사에서 늘 혼자였다. 아니구나. 반 년 정도는 항상 나와 붙어 다니던 녀석이 있었지. 그때 그 녀석과 나는 이렇게 불렸다. ‘볼드모트와 해리포터’
갓 대리를 달았을 때였다. 송한주라는 이름의 신입사원이 부사수로 내게 배치됐다. 작은 키에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 늘 동그란 모양의 안경을 쓰고 다니던 여자아이. 첫인상이 딱 해리포터 같았기 때문에 나와 한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세트로 별명이 붙었다.
처음에는 귀찮았지만 며칠 일을 가르치다 보니 꽤 똘똘하게 따라와 줬기에 어느 사이 나도 녀석을 조금씩 신경 쓰기 시작했다. 팀장이 귀띔해 준 ‘영빈이 네 직속 후배야. 같은 대학, 같은 경영학과’라는 말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도 있지만.
“어때, 너네 해리포터? 일 잘하지?”
한주를 받은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 지호가 물어왔다.
"잘 해, 확실히. 애가 센스도 있고”
“그럴 것 같았어. 걔가 입사 점수 1등이거든”
“야. 인사팀이 그런 거 막 말하고 다녀도 되냐?”
지호는 씨익 웃으며 담배 연기를 위로 뿜었다.
“어차피 너 이거 말할 정도로 친한 사람도 없잖아. 아, 그리고. 이 형님이 그 1등 인재, 너한테 보내려고 힘 좀 쓰셨다는 것만 알아 둬라. 오늘 소주 한 잔 콜?”
시간이 지나며 내가 한주 덕을 보는 경우가 어느 틈에 잦아졌다. 다른 부서와의 업무 미팅에서 내 공격적인 태도 때문에 상황이 험악해질 때면, 한주의 미소와 애교로 분위기가 누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똘똘하면서도 부드럽게 일을 처리하는 동료. 내게는 가장 이상적인 부사수였다. 영빈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한주도 거칠어질 때가 가끔 있었다. 화가 날 때면 한주의 코끝이 빨개진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날이었다. VMD팀과의 미팅에서 본격적인 말싸움으로 돌입하기 직전인 한주를 진정시킨 후 내가 분위기를 중재해야 했다.
워낙 마케팅과 앙숙인 사이였지만, 터무니없는 원칙을 내세워 한주와 내가 기획한 매장 프로모션 아이디어에 계속 딴지만 걸어오는 것에 한주가 나보다 앞서 폭발한 때문이었다. 서로의 이견만 확인하고 소득 없이 미팅이 끝났을 때였다. 한주가 어느 틈에 정상으로 돌아온 코 끝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대리님, 저 맥주 한 잔 사주세요”
그 술자리 이후 한주는 예전 같은 공손한 부사수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곧잘 다투는 사이가 됐다. 일로 심각하게 대립했다는 것은 아니다. 한나는 술기운에 기대어 그날 처음으로 마케팅에 대한 자신의 견해, 혹은 시각을 전하려고 했고, 물론 당시의 내게는 설득력 없이 들렸다.
“우리는 마케터잖아요. 게다가 FMCG인 카페 브랜드의 마케터”
“그렇지”
“그럼 매장에 온 사람들에게 행복한 경험을 줘야 되잖아요. 고객을 행복하게 해서 우리 브랜드를 선택하게 하는 거, 그게 마케팅이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대리님은 왜 일할 때 행복하지 않아요?”
한주의 당돌한 질문에 별생각 없이 한 알씩 입에 넣던 땅콩이 목에 걸렸다. 캑캑 대며 한참 기침한 후에 한주를 바라봤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한주는 양쪽 볼이 발개진 채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동그란 안경 속의 큰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얘는 얼굴 곳곳을 빨갛게 물들이는 걸로 감정을 표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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